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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의 해외여행

베트남 나트랑. 해변 해수욕장과 일출, 보 반 끼 공원, 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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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에서 세계로!’
1. 멀고도 가까운 나라 비엣남 냐짱을 가다
 
비엣남 냐짱 넷째 날(2024. 9. 30.)
 

벌써 여행 마지막 날.
금세 지나쳐버린 날이 억울했던지, 아침 일찌거니 눈이 떠진다. 그리고 곧바로 호텔 앞 해변으로. 그래도 해변도시를 왔는데 해수욕은 해봐야지. 부드러운 모래사장만 거닐어볼까 하다가 밀려오는 파도에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고, 가슴을 담그고, 잠수까지 즐긴다. 수영을 배웠더라면 시원하게 물살을 가를 텐데, 개헤엄을 치니, 물속을 들락날락만 할 뿐이다.
 

호텔 전용 선베드에 누워 멋진 해맞이도 기대했는데, 변덕스러운 날씨가 쉬이 허락하지 않아 얄밉다. 구름 사이로 빼꼼히 내미는 해님이라도 사진에 담아보지만 그닥 만족스럽진 않다.
아침을 먹고 호텔 라운지에서 잠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귀여운 도마뱀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 녀석 어찌 들어왔는지, 5성급 호텔에서 무전여행으로 호강하네. 하도 작아 잡아보기라도 할라치면 죽을 것 같아 사진으로만 잡아본다.
 
 
 
 
 
 
 
 
 
 
 
 

버스로 시내를 돌면서 몇 차례 지나치며 저긴 어딜까 궁금한 곳이 하나 있다. 나트랑 기차역 맞은편에 나무숲이 우거진 작은 보 반 끼 공원(Vo Van Ky Park). 프랑스 식민 시절, 저항전쟁의 선봉에 선 영웅 보 반 끼를 기리는 공원이다. 1945년 나트랑 카인호아 전선에서 101일 밤낮의 전투가 벌어질 당시 보 반 끼와 특수부대 병사들은 나트랑 역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한다. 그래서 세워진 기념비. 전투 준비를 마친 영웅적인 순교자 보 반 끼가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는 듯하다.

베트남은 인구 1억이 넘는 큰 나라다. 시쳇말로 동남아시아의 VIP로 통한다. 인구 1억이 넘는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함께 세 나라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이 VIP. 그런데 전봇대를 보면 VIP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듯하다. 얼기설기 무수하게 엉켜있는 전깃줄. 금방이라도 정전으로 불이 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십수 년 전 북부 하노이에 갔을 때도 남부 호찌민에 갔을 때도 이런 전깃줄이 지저분해 보이고, 안타깝기까지 했는데, 현재 관광도시인 이곳 나트랑도 여전히 판박이다.

오토바이의 나라답게 예나 지금이나 출퇴근 시간이면 오토바이가 도로를 온통 점령한다. 아빠가 운전하면서 앞에 막내를 안고, 가운데 첫째 아이, 맨 뒤에 엄마, 이렇게 4명이서 오토바이 한 대로 함께 이동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어 입이 떡 벌어진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쳐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4인승 오토바이를 찾았는데, 결국 실패! 아쉬운 대로 3인승 오토바이를 사진에 담는다.
 
롯땡마트에서 선물을 사고, 마지막 관광 일정은 쩌담이라 불리는 담시장. 나트랑 최대 재래시장으로 우리나라 남대문시장을 연상시킨다. 과일과 향신료, 비단, 잡화 등 다양한 물품이 있다. 개방형 건물이어선지 아니면 현지인들에게 더위가 익숙해서인지 에어컨이 없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해 10분을 못 버티고, 아이쇼핑을 접을 수밖에. 예정보다 시장 일정이 빨리 끝나다 보니, 각자 호텔로 가 씻으면서 쉬기도 하고, 시원한 콩카페를 찾아 달달한 코코넛 스무디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골땡땡 스크린 골프장에서 운동도 하는 등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베트남까지 와서 롯땡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골땡땡에서 스크린까지 즐길 줄이야. 하기야 나트랑 어디를 가든 현지인 말고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니, 그리 생소한 경험은 아니다. 다시 모인 장소는 마지막 식사를 위한 식당. 메뉴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 적응훈련(?)차 김치찌개. 굳이 적응훈련까지 했어야 하나 싶다. 현지인 식당을 찾아가 현지식을 맛보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어쨌건 배를 불리고 나서 공항 가기 전 참새가 방앗간을 들르듯 마사지시술소로 향한다. 귀 청소 마사지. 공항 가기 전에 시원하게 케어받으러 가는 코스다. 족욕, 얼굴과 두피 마사지, 귀 청소 등을 두루두루 받는다. 모두 꼭 해보고 싶다는 귀 청소. 시원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상당히 깊숙이 파고 들어가 무서울 정도다. 일행들이 아무 말 없어 다들 시원한가 보다 생각하며 눈만 찔끔거리고 꾹 참아본다.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속이 메슥거린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결국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 화장실행. 한참을 화장실에 앉아 있다 나오니, 일행들이 모두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다.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인 양 고개를 숙인 채 버스에 오른다. 귀 청소 마사지에 대한 반응은... 다들 떨떠름하다.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다는... ㅋㅋ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공항 가는 길이 심란하다. 길다면 긴 5일간의 여행이 후딱 지나버렸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피곤했던지 잠이 스르르 밀려온다.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 1천 년 넘게 후딱 지나쳐온, 그 사이 소설처럼 파란만장했던 베트남의 역사가 꿈 속에서 펼쳐진다.
 
1천 년 중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룬 응오꾸옌은 응오 왕조를 세우고 수도를 옛 어우락 왕국의 도읍 꼬로아 성에 잡는다. 그러나 응오 왕조도 외척의 반란에 이어 전국 12명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 십이사군 시대를 열면서 30년 단명 왕조로 막을 내린다.
십이사군의 혼란기는 딘보린의 등장으로 종식된다. 십이사군 중 한 군벌의 치하에 들어가 그 세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뒤 968년 다른 11개 군벌을 물리치고 통일한다. 딘 왕조의 시작이다. 국호는 ‘안남’에서 ‘대구월’로 바뀐다. 딘보린은 자신의 본거지인 호아 루에 도읍을 정한다. 972년 코끼리 상아, 코뿔소 뿔, 천, 차 따위를 송나라에 바치자, 황제는 그 보답으로 딘 왕조와 통교하고 교주의 통치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979년 도틱이라는 환관이 야밤에 자고 있던 딘보린과 황태자를 기습해 죽여버린다. 권력의 공백을 틈타 레호안 장군이 섭정으로 권력을 잡고, 5세의 딘또안을 새 황제로 추대한다. 레호안이 스스로를 부왕(副王)이라 칭하며 베트남의 실권을 좌지우지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이를 틈 타 송나라가 쳐들어오자 레호안은 딘또안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전 레 왕조를 개창한다. 레호안의 뛰어난 군사 지휘력으로 송의 침입을 막아내고 조공을 바치면서 정식 책봉을 요구하자, 송 태종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후 레호안은 남하 정복전쟁을 벌여 참파를 공략, 속국이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내적으로는 불교를 크게 장려하고 운하를 개통한다. 레호안이 1천5년 붕어하자 그 아들 레롱비엣이 즉위하지만 3일 만에 레롱딘에게 살해당한다. 레롱딘은 잔혹한 성품이어서 민심을 잃고, 1천9년 2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후 리꽁우언이 새 황제로 추대돼 전 레 왕조가 무너지고 리 왕조가 들어선다.
리 왕조는 베트남 최초 장기 집권 왕조다. 이전의 응오 왕조, 딘 왕조, 전 레 왕조 등등이 하나같이 몇십 년도 못가 무너진 것과 달리 무려 9대 216년간 베트남을 안정적으로 다스린다. 하노이를 수도로 삼아 과거제를 처음 실시하는 등 오랜 통치기를 바탕으로 베트남의 행정체계를 다지는 등 베트남 역사의 황금기를 일군다. 탕롱으로 천도해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하노이를 수도로 삼는다. 송나라와 관계를 개선하고, 대리, 참파를 공격해 밖을 안정시킨다. 국자감 설립, 과거제 실시, 불교와 도교 장려, 조세체계 개편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긴다. 태조에 이어 태종, 성종 등 잇따라 성군의 통치가 이어진다. 중국의 천자(天子)에 맞서 스스로를 남제(南帝)라고 칭할 정도로 중흥기를 일군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1천100년대 후반 들어 리 왕조의 국력이 시름시름 거리다. 고종과 혜종, 잇따라 암군이 나타나고, 외척 쩐투도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다 혜종을 폐위하고 그의 딸을 황위에 올린다. 그 후 쩐투도는 자신의 조카인 쩐까인을 황제와 결혼시키고, 1225년 쩐까인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리씨의 제위를 탈취하고 리씨 황족을 몰살시킨다. 쩐 왕조의 시작이다. 베트남의 2번째 장기 집권 왕조. 13대 176년 동안 존속한다.
 
쩐왕조는 건국 과정에서는 흠결이 있지만, 리 왕조 말기 빈번했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의 안정을 되찾는다. 여기에 몽골 제국의 침략마저 막아낸다. 우리나라에 이순신이 있다면 베트남에 쩐흥다오가 있다. 쩐 왕조시대엔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는다. 1천257년 송나라로 향하는 길을 내놓으라는 구실로 전쟁을 선포한 것. 1차 침입에서 원나라 군대는 수도 탕롱을 함락하지만 전염병을 창궐하자 철군한다. 2차 침입은 1천284년 쿠빌라이 칸이 참파, 운남, 광동, 세 갈래로 협공한다. 또다시 수도 탕롱이 함락돼 멸망 직전까지 몰리지만, 1천285년 4월 쩐낫두앗이 함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세가 바뀐다. 5월엔 쯔엉즈엉 전투에서 쩐흥다오가 원나라 해군을 대파하고, 원나라 총사령관 소게투마저 전사하면서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다. 쿠빌라이는 1천287년 3월 일본 원정을 중단한 채 3차 침입을 감행한다. 하지만 쩐흥다오가 1천288년 백등강에서 원나라 해군을 격멸해버린다. 쿠빌라이는 4차 침입을 계획하지만 그가 숨지면서 쩐 왕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전 세계를 휩쓸던 몽골을 유일하게 3번이나 이긴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베트남의 첫 전승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분에는 장사가 없다. 7대 황제 유종이 호화향락에 빠지면서 나라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다. 연달아 암군들이 즉위하면서 외척의 손에 나라가 휘둘리고, 남쪽의 참파가 1천371년부터 1천390년까지 공격을 거듭해 수도 탕롱마저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호씨 가문 출신의 호꾸이리가 모든 권력을 틀어쥐다가, 1천400년 소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해 호 왕조를 연다.
 
호 왕조는 8년 단명 왕조다. 호꾸이리는 2명의 황제를 갈아치우고 외손자 소제로부터 제위를 양위 받아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쩐 왕조의 충성파들이 끊임없이 호꾸이리를 공격한다. 쩐 황족 출신 쩐티엠빈은 급기야 중국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베트남을 호시탐탐 노리던 명나라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다. 영락제는 쩐티엠빈의 복위를 요구하며 명나라 군대와 함께 베트남으로 호송한다. 하지만 호꾸이리의 힘도 만만치 않다. 즉시 공격해 쩐티엠빈과 명나라 병졸을 모두 죽여버린다. 이에 격노한 영락제는 1천406년 21만 대군으로 호 왕조를 공격, 호꾸이리는 아들 호한트엉과 함께 난징으로 압송돼 참수당한다.
 
호 왕조를 멸망시킨 영락제는 쩐 왕조에 왕위를 돌려주지 않고, 직접 통치에 나선다. 1407년부터 1428년까지 약 20년간. 명은 베트남 전통과 풍습을 금지하고 역사서 ‘대월사기’를 불태우는 등 민족 말살 정책에 나선다. 모든 행정구역에 문묘와 학교를 세워 사서오경, 성리학, 유학을 가르치고, 승려를 파견해 불교와 도교를 전파한다. 이 과정에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부정부패에 쩔어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1418년부터 1428년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일어난 레러이의 람썬 봉기로 독립을 쟁취한다. 지방호족 출신 레러이가 왕을 자칭하고 전면전으로 가다가 명의 군대에 참패한다. 이후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꿔 똣동-쭉동 전투에서 승리한다. 베트남의 민족 영웅 레러이가 쩐 왕조의 후예 쩐까오를 황제로 내세우자 명나라는 쩐까오를 안남 국왕에 공식 책봉한다. 후 쩐 왕조, 아니 부흥운동의 시작이다.
 
레러이는 부흥기를 끝내고 베트남의 3번째 장기 집권 왕조인 후 레 왕조를 연다. 27대 358년 동안으로,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왕조다. 부흥기에 레러이가 람썬 봉기를 일으켜 명나라를 몰아내고 후 레 왕조를 개창한 것. 당나라의 대당률을 본떠 법전을 편찬하고 균전법과 토지 재분배 개혁을 단행한다. 1천460년 제위에 오른 성종은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다. 유교 개혁을 단행해 불교를 억누른다. 과거제를 실시한다. 남쪽 참파를 사실상 멸망시키고 라오스의 란쌍 왕국, 태국의 란나 왕국을 공격해 영토를 크게 넓힌다. 후 레 왕조 최고의 전성기이자, 명실상부 동남아 최강국으로 떠오른 시기다. 이후 황제들이 연이어 단명하면서 혼란에 빠지고, 1천527년 권신 가운데 막당중이 제위를 찬탈, 막 왕조를 새로 세운다.
 
충(忠)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익숙해져 있던 베트남 귀족들은 막 왕조를 찬탈자로 규정,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1천533년 응우옌씨 가문의 응우옌낌과 그의 사위이자 찐씨 가문의 찐끼엠이 후 레 왕조 복원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위기감을 느낀 막당중은 스스로를 밧줄로 묶어 명나라에 항복의 자세를 취하고 거대한 뇌물을 바치며 지원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마지못해 베트남 북부는 막 왕조, 남부는 레 왕조가 다스리는 중재안을 내놓고, 레 왕조 부흥군은 이를 거절한다. 막당중이 숨진 후 1천592년 찐씨 정권의 찐똥이 수도 하노이를 함락, 막 왕조는 막을 내린다.
 
막 왕조를 몰아낸 부흥군의 총사령관 응우옌낌은 장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실권을 좌지우지하나, 북방으로 쫓겨난 막 왕조의 첩자에게 암살당한다. 응우옌낌이 죽자 그의 양자이자 사위였던 찐끼엠이 실권을 장악해 후 레 왕조의 중흥을 선포한다. 다만 레 황제들은 실권이 없다. 모든 권력은 공신 가문인 찐씨와 응우옌씨 가문이 독차지한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찐끼엠은 응우옌씨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는 장인 응우옌낌의 세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장인의 장남을 독살하고, 차남 응우옌호앙은 남쪽으로 쫓아낸다. 힘이 부족한 응우옌호앙은 순순히 남쪽으로 물러난다. 이후 베트남은 북쪽의 찐씨 정권, 남쪽의 응우옌씨 정권으로 양분된 베트남판 남북조 시대로 접어든다.
1천627년 찐씨-응우옌씨 전쟁이 일어나 무려 45년간 지속된다. 찐씨 정권은 7차례나 대규모 공세를 펼치지만 포르투갈 포병과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농성한 응우옌씨 정권이 이를 잘 막아낸다. 두 정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1천771년 응우옌씨 정권의 폭정에 반발한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르, 응우옌반후에, 3형제가 농민을 결집해 반란을 일으켜 떠이선 왕조를 세우며 종결된다. 3형제는 노동자, 농민, 기독교도, 소수민족, 참족 등 모든 반대세력을 모아 세를 크게 늘린다. 1천777년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보루 자딘을 함락하며 왕족들을 깡그리 도륙해버린다. 장남 응우옌반냑이 떠이선 왕조를 세운다. 막내 응우옌반후에가 북쪽 찐씨 정권의 수도 하노이까지 정복하며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버티던 후 레 왕조도 끝장내버린다.
이런 가운데 도륙당했던 응우옌씨 정권의 생존자가 1명 있었다. 응우옌푹아인. 시암,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캄보디아 등 외세의 손을 빌린다. 마침 떠이선 왕조는 내분이 일어난다. 응우옌반후에가 죽자 아들 응우옌꽝또안이 제위를 물려받아 응우옌반냑과 전쟁을 벌인 것. 응우옌푹아인은 이 틈을 타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왕조이자 역사상 최대 통일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다.
 
응우옌푹아인은 국호를 ‘대남’으로 바꾼다. 프랑스 등 서양의 후원을 받아 나라를 세운 탓에 궁정에 서양인 300여 명을 거주케 하고,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던 베트남을 통합하기 위해 운하와 도로를 만들어 교통을 원활히 만든다. 태국과 손잡고 캄보디아를 나눠 먹는 등 여러모로 많은 업적을 남긴다. 뒤를 이은 민망 황제는 태국, 라오스와 전쟁을 벌여 베트남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한다. 서구에도 강경한 쇄국정책을 펴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고 선교사들을 몰아낸다. 후에 프랑스 식민화의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와 닮은꼴이다.
결국 프랑스는 1천861년 70척의 군함을 파견해 베트남 남부로 진군, 제1차 사이공 조약으로 항복을 받아낸다. 다낭 등 3개 항구가 개항되고 남부 6성이 사실상 프랑스의 손아귀로 넘어간다. 1천872년엔 베트남의 기독교도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하노이를 공격해 점령해버린다.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응우옌 왕조는 남부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프랑스는 하노이, 후에 등에 영사관을 개설한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지만, 프랑스의 승리로 베트남 장악력이 더 강해진다. 1천883년 제1차 후에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1천885년 제2차 후에 조약으로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그해 7월 보정대신들이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도망쳐 프랑스에 대항하는 ‘껀브엉 운동’을 벌이지만, 11년 만에 진압된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3개 구역으로 나눈다.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방을 프랑스령 통킹으로, 후에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을 프랑스령 안남으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부를 코친차이나로. 코친차이나는 직접 통치하고, 통킹과 안남은 형식상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에게 맡겨 간접 통치한다.
1천900년대 들어 베트남인들은 과거 봉건왕조 회귀를 주장했던 ‘껀브엉 운동’과 달리 근대화와 공화정을 추구하는 독립주의자들이 나타난다. 판보이쩌우가 등장해 동두 운동과 두이탄 운동을 벌인 것. 이로 인해 ‘쯔 꾸옥 응으’가 널리 퍼져 문맹률이 빠르게 줄어든다. ‘쯔 꾸옥 응으’는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우리네 이두와 같은 것. 당시 한자 문화권이었던 베트남인들의 문맹률이 높아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가 어려워지자, 성경을 전파하기 위해 한자를 소리 나는 대로 로마표기로 적은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가 이 두 운동을 억누르자 혁명가들은 인근 중국과 러시아를 모방해 더 급진적이고 무력적인 투쟁으로 전환한다. 판보이쩌우는 광저우에서 베트남유신회를 창설하고, 1천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세워진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공산당도 무려 3개나 창설된다. 1천930년 코민테른은 호찌민을 홍콩으로 파견해 분열된 공산 세력을 통합해 베트남 공산당을 만들도록 한다. 후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싫어한 스탈린 때문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호찌민은 프랑스, 소련 등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며 1천92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의 독립과 공산화에 힘쓴다. 하지만 1천930년대 들어 프랑스의 탄압이 거세진다.
60년간 이어지던 프랑스의 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1천940년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면서 느슨해진다.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한 상태라 일본이 동남아 식민지를 빼앗아 가든 말든 뭐라 할 여유가 없다. 일본은 중국을 압박한다는 핑계로 베트남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린다. 1천941년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을 벌이면서 일본의 도움이 더 절실해지자, 히틀러는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을 방치한다. 프랑스와 일본의 공동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 호찌민은 1천941년 공산당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을 창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끌어모은다. 1천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10일이 지나 베트남 제국도 붕괴해 143년에 걸친 응우옌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를 틈 타 호찌민과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한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다.
 
호찌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한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다. 당시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해 있다. 북부를 지배하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통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한다. 반면 남부 측은 프랑스의 지배권이 인정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프랑스 제4공화국은 프랑스 식민제국 유지를 원한다. 당시 소련과 갈등 관계에 있던 미국은 우방국을 확대하기 위해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프랑스와 호찌민의 베트민 간 전면전이 벌어진다.
1천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이 세관 업무로 충돌하면서 프랑스가 수많은 시민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진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게릴라전을 지속하던 베트민이 1천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해 전쟁이 끝난다. 베트남이 몽골에 이어 두 번째로 강대국을 꺾은 역사다.
 
1천954년 7월 21일 제네바에서 조약이 체결된다. 북위 17도를 경계로 공산주의자가 지배하는 북쪽과 미국이 지원하는 남쪽으로 나뉘어 분단국가를 이룬다. 그 후 남부 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이 결성돼 친공산주의 반란군 활동을 강화한다. ‘비엣콩’이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자 미국이 개입한다. 중국 공산화와 북한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 것을 우려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북베트남과 전쟁에 들어간 것.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1천965~75)이다. 베트남은 게릴라전을 구사한다. 특히 이웃 나라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호찌민루트를 보급로로 활용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엄청난 폭탄 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아무튼 전쟁은 미국에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란 치욕을 안기며, 1973년 파리 평화조약으로 잠시 막을 내린다. 미국으로선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임한 것이 결정타라고 자조하겠지만. 이후 1천975년 3월 10일 협정을 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 만인 3월 26일 다낭 함락, 1달 20일 만인 1천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이 난다. 이어 1천976년 7월 2일 2개의 베트남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을 이룬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고, 6·25 전쟁을 벌인 것과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만, 이후 우리는 분단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 베트남과 다른 역사다. 어쨌거나 베트남은 또다시 세계 강대국 미국을 이긴 나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고,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과거 19세기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을 비롯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베트남은 당시 막 공산화된 캄보디아 정권과 애초엔 큰 마찰이 없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는 원래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로 성장했고, 그 보답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베트남을 돕는다. 하지만 1천972년 미군이 철수하자, 위기감에 빠져 1973년 베트남 공산당과 관계를 끊고 중공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1974년부터 고토를 내놓으라며 베트남과 국지전을 벌이기 시작하고, 중공은 중공-소련 분쟁에 소련을 지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터에 1천976년 캄보디아가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중재에 나선다. 그러자 베트남은 오히려 캄보디아를 침공, 수도 프놈펜을 점령해 식민 통치에 들어간다. 그러자 중국이 베트남 북부를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 즉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베트남군은 캄보디아를 침공하느라 군대가 모두 남쪽에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중국이 우세를 보인다. 하지만 베트남군의 빠른 복귀와 강력한 방어 태세로, 중국군은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한다. 베트남이 과거 몽골부터 시작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세계 최강대국을 잇따라 물리친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겼다고 반드시 승자는 아니다. 전장이 어디냐가 중요한 법. 비록 베트남이 강대국들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지만, 전장은 그들의 나라였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는 군인들만 희생되고 배상이 따를 뿐이다. 하지만 전장을 제공한 나라는 승리했더라도 곳곳이 폐허가 되고 국민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뿌리뽑힌다. 특히나 근현대 들어 프랑스와 미국, 중국과 연이어 싸우면서 전장이 되었으니,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여기에 공산정권의 계획경제체제가 갖는 경직성,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침체에 따른 지원 부족 등은 베트남을 1천980년대 세계 최빈국이란 굴레에 가둬놓는다. 매년 수십만 명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된다. 이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 유출에 따른 악순환이 지속된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은 있는 법. 1천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친다. 1천986년 말 도이머이(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에 나선 것. 1천989년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고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룬다. 적국이던 미국과도 1천995년 통상 금지가 풀리면서 외교 관계가 재개되고, 한술 더 떠 공산권 국가 중 유일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면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합동군사훈련도 할 정도다.
프랑스,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을 차례로 막아내면서도 전장을 제공해 세계 최빈국이었던 베트남. 2천 년대 들어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는 등의 도이머이 개혁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시나브로 동남아 생산기지로서 세계 경제의 주목을 받는 신흥국가로 떠오르고 있다.
 


깜라인 국제공항에서 다시 뱀부항공 편을 이용해 무안국제공항에 도착한다. 날개 쪽에 좌석을 잡은 탓에 착륙할 때 날개의 움직임을 동영상으로 담아본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인 시점에 마음을 달래보는 재미랄까. 행복했던 여행 추억을 몇 날 며칠 곱씹어보다 뒤늦게사 후기를 끝맺는다. 게으른 탓에 쓰다가, 접었다가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벌써 두어 달이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날씨가 몹시 쌀쌀해졌다. 나트랑의 뙤약볕 더위가 되레 그리워질 정도다. 아마도 나트랑은 아직도 따스하겠지. 이제 또 언제쯤이나, 누구와 함께 어디로 떠나볼 수 있으려나? ‘무안에서 세계로!’ 떠나는 두 번째 세계여행, 그날이 빨리 오길 학수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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