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9.
영국 런던과 이탈리아 여행기6
유럽여행 여섯째 날!
로마에서 버스로 무려 4시간을 달려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 도착한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지방 토스카나의 주도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다. 로마 퇴역장성의 정착촌으로서 처음 도시가 만들어진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요, 꽃의 도시요, 르네상스 말기 오페라가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다. 대부분의 주택 지붕은 주황빛이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을 받아서다.
지명은 꽃을 뜻하는 피오레(Fiore)에서 유래한다. 15세기 이후 메디치 가문을 기반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의 꽃 르네상스가 피어난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단테의 고향이고,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가죽공예도 유명하다. 인두로 구매자의 이니셜을 직접 새겨준다. 동물의 외피로 만들기 때문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맘 놓고 메고 다닐 수 있다.
피렌체는 인근 시에나와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13세기 맞닿은 두 도시 간 경계를 두고 틈만 나면 으르렁거디라다 결국 ‘검은 수탉’에게 운명을 맡기기로 한다. 두 도시 간 영역을 결정하기 위해 양쪽의 기사들이 새벽에 수닭이 울면 서로 달려가 만나는 지점에서 경계선을 긋기로 한 것이다. 피렌체는 닭을 이틀이나 굶긴데다가 밤에 한 사람이 촛불을 켜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 새벽이 온 것처럼 하자, 수탉이 매우 빨리 운다. 덕분에 일찍 출발한 피렌체 기사들은 시에나쪽으로 12킬로미터나 더 진격하게 된다. 그래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키안티 클라시코’다. 이탈리아 와인을 대표하는 키안티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키안티 와인의 표상은 자연스럽게 검은 수탉이 차지한다. 이 와인이 유명한 것은 토스카나 출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 ‘콜마토레’ 덕분이다. 숙성 과정에서 외부 공기를 차단해줌으로써 와인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메디치 가문은 메디치(Medici)라는 단어가 의술(Medicine)과 연관 있고, 가문의 문장이 여섯 개의 알약처럼 보여 조상이 약 제조와 연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모직업과 은행업으로 평범한 중산층에서 출발해 유럽 최고의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단테의 ‘신곡’에 사채놀이를 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사회상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 때문인지 환전사업으로 일어섰던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에 손을 내민다. 1412년 교황청과 전속 은행 계약을 한 것. 이 때부터 메디치가문은 날개를 단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상업자본으로 출발한 정치권력이 300년 넘게 유지된 것은 피렌체 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이 유일하다. 메디치가문의 업적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중세시대 대학의 한계를 발견하고 인문학을 태동시킨다. 사고방식의 전환을 위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 초월적 사고를 중시하는 플라톤을 부활시킨다. 당시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현상 세계를 중요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파격적인 예술가 후원으로 르네상스를 견인한다. 부의 목적은 하층민을 보호하고 공동체의식을 수호하는 데 있음을 실천해 가문의 명예를 남긴다. 이 때문에 다른 가문으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édicis 1389~1464)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édicis 1449~1492), 두 사람. 코시모는 고리대금업으로 번 막대한 돈을 교회와 도서관, 병원 건립, 학문 지원에 쏟아 붓는다. 상인과 군인, 예술가, 성직자 등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로 네트워크를 형성, 창조와 혁신으로 연결한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이를 ‘메디치 효과’라 부른다.
코시모 이전, 가문의 경제적 기초를 닦은 이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피렌체의 주력사업이던 모직업을 하다 1397년 메디치은행을 설립한다. 유럽 전역으로 지점을 확대하던 중 폐위된 불법교황 요하네스 23세를 돈으로 석방시킨다. 망명생활을 돕고, 사후 영묘까지 만들어주는 신뢰를 보인다. 이로 인해 유럽 각 통치자와 후대 교황에게 신용과 믿음의 가문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가능하면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라는 가르침으로 후손에게 정치에 관심두지 말라고 유언한다. 아버지가 평민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처형당하고, 할아버지 세대의 친척이 길드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치옴피 반란’을 선동해 다른 귀족들로부터 엄청난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메디치 가문은 친서민적이고, 공동체의식을 중요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16세기 중엽부터 피렌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한다. 결국 조반니 디 비치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국외 추방이라는 첫 시련을 경험한다. 코시모는 언제나 자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해 피렌체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가문의 저택도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으리으리한 저택을 마다하고, 미켈로초가 설계한 대로 작고 검소하게 짓는다. ‘메디치 저택(Palazzo Medici)’이다. 산 로렌초 성당과 대각선으로 배치돼 있다.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저택은 코시모 1세가 피렌체 대공으로 등극하면서 정부청사를 용도 변경한 베키오 궁전이다.
15세기 전반, 메디치 가문의 최대 경쟁자 알비치 가문이 메디치 저택의 규모가 피렌체의 상식과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검소하게 지었음에도 시비를 건 것이다. 두 가문의 급부상을 경계하던 피렌체의 또 다른 명문가들이 코시모를 반역 혐의로 고발한다. 코시모는 목숨만 겨우 건지는 대신 피렌체에서 추방당한다. 베네치아에서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정’하는 스파이작전을 배우다 1년만에 알베르티 가문과 협력해 귀환한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피렌체의 실질적 영주 자리에 오른다.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해 신플라톤주의를 불러옴으로써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립, 새 시대를 맞는 르네상스 태동의 정점을 찍는다. 보티첼리 등을 후원하며 거대한 예술적 반향을 일으킨다.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 사후 그에게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코시모가 제일 총애한 예술가는 조각가 도나텔로. 도나텔로는 예술적 조각작품을 부활시킨 인물이다. 로마시대 조각작품이 성행했으나, 중세를 거치며 부조로 대체됐다. 이후 다시 조각을 시작하게 된 인물이 바로 도나텔로다. 하지만 성질이 괴팍해서 자신의 조각작품 값을 깎으려 하면 커다란 망치로 작품을 깨부숴버리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코시모는 개인 작품활동이 아닌 공적 활동으로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외부 장식을 맡기기도 한다. 농장을 선물해 생계를 이어가게도 해주지만, 농장 경영이 힘들다고 하니, 현금으로 후원해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그러던 코시모가 죽자, 도나텔로는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이 죽거든 코시모 옆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 유언에 따라 도나텔로는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 함께 잠들어 있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는 통풍으로 병약했다. 소위 잘 나가던 메디치가의 실권을 넘겨받았지만 2년만에 세상을 떠나 호사가들로부터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연극이나 서커스에 등장하는 어릿광대 피에로가 여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있다. 조다. 고구려 장수왕 아들이지만 장수왕이 너무 장수(98세)하는 바람에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요절한다. ‘쪼다’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 영국에서도 조만간 그런 왕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비아냥이 벌써부터 나온다. 아직까지도 건장한 엘리자베스 2세의 나이는 92세다. 차기 왕위가 아들 찰스가 아닌 손자에게 넘어가지 않을지 두고 볼 일이다.
이후 코시모가 총애하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실권을 잡는다. 로렌초는 로마에서 가장 세도가 높은 오르시니(Orsini) 가문의 딸과 결혼한다.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는 출발점이다. 1478년 당시 은행업을 놓고 경쟁하던 파치 가문이 교황 식스투스 4세와 함께 음모를 꾸며 부활절에 로렌초의 암살을 시도한다. 동생 줄리아노만 희생된 채 무위로 끝난다. 그 일로 파치가는 멸족된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 맹주로 떠오른다. 줄리아노의 아들은 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해 16세기 파란만장한 로마 역사의 장본인이 된다. 식스투스 4세는 다시 나폴리 국왕 페란테를 부추겨 피렌체를 도발한다. 당시 나폴리군은 피렌체의 외곽에 위치한 마키아벨리의 집을 빼앗아 장교 관사로 활용한다. 마키아벨리는 아버지를 남겨둔 채 어머니와 함께 피신한다. 인접한 라이벌 도시 시에나를 비롯해 루카, 우르비노의 군대까지 동원된 연합군이 피렌체를 에워싸자, 로렌초는 고독한 결정을 내린다.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적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희생을 감당하는 것이 영광일 뿐입니다”라는 유언장을 남긴 채 혈혈단신 나폴리 왕국에 가 페란테 국왕과 담판을 짓는다. 담판을 승리로 이끈 로렌초는 피렌체에 평화를 가지고 금의환향한다. 이때부터 로렌초의 이름 앞에 ‘위대한 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보티첼리는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라는 작품을 남긴다. 전쟁의 신 아테나가 순결한 처녀 팔라스의 모습으로 나타나, 켄타우로스라는 괴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그림이다. 팔라스의 옷에 메디치 가문의 문장인 삼중 다이아몬드를 그려 찬양한다. 그림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은 배는 로렌초가 피렌체에서 나폴리로 갈 때 타고 간 배일 것이다.
식스투스 4세와 정치적으로 화해한 로렌초는 피렌체의 거장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이 막 건축한 시스티나 소성당의 내부 장식을 돕게 한다. 로렌초가 후원한 가장 위대한 인물은 조각가요, 건축가요, 화가요, 사상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와 동갑내기였던 로렌초의 아들 조반니는 나중에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한다. 미켈란젤로는 10대를 함께 보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10세, 클레멘스 7세를 위해 일하게 된다.
로렌초의 말년은 그가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사로 초대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종교적 도전과 겹쳐진다. 사보나롤라 수도사는 르네상스의 탐미정신에 철퇴를 가한 인물이다. 로렌초는 사보나롤라를 마지막으로 접견하고, 평생을 함께 지낸 인문주의 철학자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492년 조용히 눈을 감는다.
당시 이탈리아는 화약을 탑재한 대포를 앞세운 프랑스 샤를 8세의 침략으로 무참히 무너진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포로 돌을 쏘았지만 화약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도입되면서 이탈리아는 속수무책이었다. 피렌체도 사정은 마찬가지. 아버지 로렌초에게서 아무런 재능도 물려받지 못한 무능한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를 탈출한다.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시련이다. 또 이름이 피에로다. 이 때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피렌체에 심판이 온 것이라는 설교를 한다.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로부터 종교적으로 인정을 받아 피렌체의 신정정치 통치자로 군림한다. 허영과 사치를 모아 불 태우는 어마무시한 교회 개혁을 주도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불에 타 죽는다. 난잡한 성생활과 부패의 대명사였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보나롤라의 교회 개혁운동에 위기의식을 느껴 그를 이단 혐의로 파문하게 된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교황의 위협이 시작된데다 지나친 교회 개혁에 염증을 느낀 피렌체 시민들마저 사보나롤라에게 반기를 든다. 교황측과 사보나롤라 측의 논쟁이 시작된다. “당신이 진정 신의 사자냐?”, “그렇다.”, “불위에 걸어가도 타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그렇다.”, “그렇다면 함께 불 위를 걸어가보자.”. 시뇨리아 광장에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사보나롤라는 “성직자의 옷을 입고 걸어야 하는지 신학적으로 토론을 해야 한다.”라며 시간을 번다. 시민들의 성화에 못이겨 광장에 다시 나온 사보나롤라는 또다시 “목에 십자가를 달고 가야 하는지 토론해야 한다.”라며 시간을 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일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뚝뚝 떨어진다. 사보나롤라는 “신께서 원하지 않는 심판이다.”라며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이미 분노해 있던 시민들은 그를 붙잡아 화형에 처한다. 평소 그가 ‘허영의 화형식’을 했던 시뇨리아 광장에서. 시신은 가루로 빻아 아르노강에 뿌린다. 다시 메디치 가문이 복귀한다.
메디치 가문은 3명의 교황을 배출한다. 로렌초의 둘째 아들인 레오 10세, 로렌초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 클레멘스 7세, 그리고 레오 11세. 프랑스 왕비도 배출한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 프랑스 발루아왕조 앙리 2세의 왕비다. 손으로 음식을 먹던 프랑스에 포크문화를 전파한다. 하지만 비극적이다. 앙리 2세가 20세 연상녀 디안 드 푸아티에를 세컨드로 맞이한 것. 디안 드 푸아티에는 ‘달의 여신’이란 별명을 얻으며, 프랑스 미의 기준을 세운다. 하얀 피부와 치아, 손/ 검은 눈썹과 눈, 눈꺼풀/ 장밋빛 입술과 손톱, 볼/ 가는 입술과 허리, 발목/ 부드러운 입술과 머리카락, 손/ 작은 유두와 코, 머리/ 풍만한 팔과 허벅지, 엉덩이 등이다.
피렌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적 침입을 살피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높이의 파수대. 500m마다 하나씩 세워졌다고 한다.
얇디얇은 마르게리타 피자 한 판을 뚝딱 먹어치우고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간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이탈리아인의 대중음식이다. 1889년 나폴리의 한 피자 장인이 국왕 옴베르트 1세와 왕비 마르게리타를 위해 특별한 피자를 만든다. 400도를 넘는 화덕에서 만들어진 피자. 그런 사연으로 왕비의 이름을 빌린 피자가 탄생한다. 하도 적어 1인1피자로 시켜 먹는다.
피렌체에서의 첫 방문지는 14세기 후반에 완성된 고딕양식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됐다. 성당 벽면을 따라 미켈란젤로, 단테, 갈릴레오, 로시니, 마키아벨리 등 피렌체 출신 유명인들의 묘지와 기념비가 있다. 묘지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성당에는 도나텔로의 ‘수태고지’, ‘십자가’, 지오토의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등이 있다. 성당 건물 왼쪽에는 단테의 조각상이 있다. 발 밑 양쪽에 사자가, 발 뒤에 독수리가 단테를 호위하고 있다.
베키오 궁전으로 발길을 돌린다. 94미터 높이의 위엄을 갖춘 고딕 종탑이 눈에 띈다. 피렌체 공화국 정부의 청사였다. 현재 시청사로 사용된다. 피렌체 공화국의 문장을 지닌 사자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메디치가의 사람들이 거처했던 방도 보존돼 있다.
베키오 궁전 동쪽에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수태고지’,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르네상스 미술작품과 조각작품을 오롯이 전시하고 있다. 350여 년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유품이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가 1737년 가문의 재산을 모두 피렌체에 기증한 것이다. 기증 조건은 이 작품들이 절대 피렌체를 떠나선 안 된다는 것. 이후 그녀의 유언을 깨뜨린 이는 나폴레옹과 히틀러 두 명뿐이란다.
베키오 궁전 앞에 펼쳐진 시뇨리아 광장. 피렌체 행정의 중심지다. 궁전 앞 양쪽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코카스상’이 나란히 서있다. ‘헤라클레스와 코카스상’은 메디치 가문의 사보나롤라 수도사 권력에 대한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승리에 비유한 형상이다.
광장에는 또 ‘켄타우로스를 공격하는 헤라클레스’, ‘메두사의 목을 베어든 페르세우스’, ‘사반느의 여인의 납치’, 피렌체의 상징인 ‘사자’ 조각상이 있다. 바다의 신 ‘넵튠의 분수’도 있다. 분수 근처에는 청동으로 된 둥근 바닥돌이 깔려있다.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화형에 처해진 곳을 알리는 동판이다.
광장의 압권은 역시 코시모 데 메디치 청동기마상. 코시모의 기마상을 손바닥에 올려놓는 사진을 찍어본다.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을 손아귀에 넣다니 괜히 우쭐해진다. 1537년부터 1574년까지 르네상스 후기에 재위한 토스카나의 첫 번째 대공이다. 그가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로렌초도 찾았지만 이곳에 없다. 산 로렌초 성당에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예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나와 좀 걸의면 단테의 생가가 있다. 1313년 발표한 ‘신곡’의 저자 단테. 그가 살던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며놨다. 벽면 커다란 박물관 포스터 아래 조그마한 단테 흉상이 있다. 그의 집이라는 의미다. 같은 골목에 단테가 다니던 교회도 있다.
단테의 본명은 두란테(Durante). ‘참고 견디는 자’라는 뜻이다. 단테는 지옥같은 삶을 살았지만 이를 참고 견뎌낸다. 피렌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단테는 1274년 봄, 아홉살에 피렌체 최고 귀족의 딸이었던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게 된다. 한눈에 불같은 사랑에 빠진 단테는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역동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라고 표현한다. 그로부터 9년 후 단테는 아르노강의 베키오 다리에서 다시 베아트리체를 마주치게 되지만 몰락한 귀족의 아들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차마 말을 건네지 못한다. 이후 단테는 약혼녀와 결혼하고, 베아트리체도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1290년 24살의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아트리체의 죽음은 단테에게 충격과 좌절, 그 자체였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청춘의 고뇌와 사랑의 찬미를 담은 시집 ‘새로운 인생’을 펴낸다. 중세시대엔 오직 신만이 사랑을 했지만, 그러한 때 단테는 인간의 숭고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신곡’에서 다시 안내자로서 베아트리체가 등장한다. 그러기에 단테의 ‘신곡’은 중세와 르네상스, 근대를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 단테는 기병대의 일원으로서 전투에 참전하면서, 본격적으로 피렌체의 정치에 끼어들게 된다. 이전까지 단테의 삶이 ‘숙고하는 삶’이었다면, 이 때부터는 ‘행동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강조하고 실천하셨던 ‘행동하는 양심’, 바로 그런 삶이다. 김 대통령께서도 필시 단테를 읽으셨음이라. 당시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된 혼돈 속에서 단테는 교황파의 일원이었다. 35세에 피렌체의 ‘프리오리’라는 당대 최고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프리오리’는 피렌체의 최고 행정기관이다. 6인 집단 수상체제다. 법안 제안권을 갖고 재판에도 관여한다. 이 일로 1300년 로마에 가게 된다. 하지만 영화도 잠시, 이때 고향 피렌체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 때아닌 추방령을 받는다. 가족과 고향을 떠난 단체는 유럽의 도시 곳곳을 떠돌며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나는 순례자처럼, 아니 거지처럼 떠돌고 있다. 행운의 여신은 내게 가혹한 운명을 안겨주고, 나는 인생을 실패한 패배자로 살아간다. 돛이 달려 있지 않은 배에 올라탄 나는 비참한 가난이 인도하는 대로, 이 바다, 저 바다로 떠돌고 이름 모를 항구로 내몰리고 있다”라고 한탄하면서. 결국 단테는 구이도 다 폴렌타 가문의 후원을 받으면서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인 이탈리아 동북부 항구도시 라벤나로 가게 된다.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의 단테 묘지는 가묘일 뿐이다. 피렌체가 줄기차게 이장을 요구하지만, 7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라벤나는 돌려줄 생각이 없다.
신곡의 원제는 ‘코메디’다. 왜일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원래 코메디는 권력을 가진 자, 힘 있는 자, 부유한 자들을 풍자해 웃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코메디를 하는 자들을 시골로 내쫓는다. 그래서 그들은 시골마을, 즉 코메(kome)를 떠돌아 다니면서 연극을 하게 된다. 여기서 '코메디'란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코메디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장르라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웃을 수 있는 대목은 없다. 하지만 작품 명 ‘곡’을 보면 분명히 코메디다. 중세의 체제를 뒤흔드는,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위협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암흑의 시대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의 서막을 알린 ‘신곡’. 신곡의 첫 출발점인 지옥편에서 단테는 “내 인생 최전성기에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어두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라고 적었다. 단테가 신곡을 쓰기 시작한 시점은 피렌체에서 프리오리가 된 35세 때다. 인생의 최고 정점에 올랐을 때 문득 뒤를 돌아보니 길을 잃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무겁게 말문을 연 단테는 욕망을 뜻하는 표범과 권력의지를 뜻하는 사자, 재물에 대한 욕심을 뜻하는 암늑대를 발견한다. 욕망과 권력과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서 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라고 묻자 “한 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라며 단테를 이끌고 간다. 고대 로마의 시인으로서, 건국 이야기 ‘아이네이스’라는 서사시를 완성한 베르길리우스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려면 인생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단테는 “나는 아이네이아스도 아니고 바울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신곡’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이 합체돼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후 저승의 세 영역인 지옥, 연옥, 천국까지 먼 여정을 시작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은 단테는 마침내 구원받게 되는 참회자로 묘사된다. 사랑했던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 신의 옥좌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그 도중에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만나면서 신학과 철학, 시 등에 대해 심오한 대화를 나눈다. 핵심 주제는 바로 ‘별(희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테의 생가를 지나면, 영화의 배경이 된 ‘냉정과 열정 사이’ 거리다. 한 주택에 6개의 알약을 표현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눈에 띈다.
1966년 아르노강이 사상 최대로 범람한다. 피렌체의 중심지가 물바다가 되고 문화재도 큰 피해를 본다. 이를 복원하면서 일본인이 제일 잘 한다는 내용을 에둘러 표현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만들어진다. 쳇,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이 절정일 때 연인은 열정 상태다. 그러나 뜻밖의 갈등이나 이별을 마주하면 그들의 사랑은 냉정해진다.
피렌체 골목의 건물들은 수백 년 동안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오고 있다. 커다란 돌로 짜 맞춘 도로 역시 마찬가지다. 브루넬레스키와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이 보던 대로 보고, 걷던 대로 걸어보는 재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뿐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거리 끄트머리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보인다.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피렌체 공화국 종교의 중심지다. 화이트, 핑크, 그린색의 대리석이 조화롭게 기하학 무늬를 이룬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1296년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성녀 레파라타 성당 위에 두오모 공사를 시작한다. 이후 지오토 디 본도네 등 초기 르네상스 건축 명장들이 동원돼 140년에 걸쳐 만들어지지만 지붕을 얹지 못한다. 1436년 마침내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돔이 올라가면서 화려하게 피어난다.
가장 먼저 맞딱뜨리는 건물이 바로 성당의 돔. 브루넬레스키돔이라고도 한다. 로마 판테온 신전에서 공부해 만든 돔이다. 후에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보고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을 만든다. 400만 개의 빨간 벽돌로 쌓아 무게가 무려 3만7천톤. 돔의 바깥쪽 직경이 45미터고, 돔의 안쪽 직경도 42미터에 이른다.
돔 건너편에는 컴퍼스로 설계도면을 그리면서 돔을 쳐다보는 브루넬레스키 동상이 있다. 마치 “내가 잘 지었지?”라고 자랑하는 듯. “그래, 너 잘났어.”라며 미소로 응답해준다. 비아냥이 아니라 ‘아레테(Arete)’, 즉 탁월함으로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서. 성당을 설계한 캄비오가 왼쪽에 나란히 서있다.
돔 반대쪽에는 지오토의 종탑이 돔과 마주하고 있다. 고딕 양식이다. 서양 미술사 최초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건축물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지오토가 1334년 제작을 시작한다. 제자 파사노가 1359년 완성한다. 85미터 높이로 브루넬레스키돔보다 6미터 낮다. 계단은 414개로 역시 돔 계단(463개)보다 적다. 지오토의 종탑 정문 위 둥근 아치에는 ‘수태 고지’ 모자이크가 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회임을 알리는 장면이다.
드디어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신곡’을 설명하는 단테의 벽화가 있고, 돔에는 조르주 바사리의 프레스코 천장화 ‘최후의 심판’이 웅장한 모습으로 반긴다. 돔 아래 바닥에는 ‘천국의 심판’, ‘창세기’ 등의 모자이크 장식이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돔 꼭대기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피렌체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가 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목말라하던 두 주인공의 학수고대한 만남이 이뤄지는 마지막 배경지여서, 행복이 묻어나는 듯 하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기다란 줄을 보고는 올라가는 것을 포기한다. 여행은 여유로워야 하는데.
성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지오토의 종탑 맞은편에 8각형 모양의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다. 도시의 수호성인인 조반니에게 바친 것이다. 성세례 요한 세례당이라고도 한다.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이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천국의 문’. 기베르티가 만든 것으로 모세 이야기 등 구약성경의 10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베르티는 이 문에 자신의 사인을 남긴다. 부조로 자신의 얼굴을 새긴 것이다. 중세시대 예술가는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자기 얼굴을 넣음으로써 자기가 했다는 것을 자랑한다.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입체감과 정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은 천국 앞에 있는 것이 옳다.”라고 해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훗날 로뎅은 이 문을 보고 ‘지옥문’을 구상한다. 천국의 문 위에는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과 천사가 이를 증언하는 조각상이 있다.
피렌체는 1348년 흑사병이 한 번 휩쓸면서 도시 인구의 80%가 사망한다. 1401년 또다시 흑사병의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큰 피해 없이 사라진다. 피렌체시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오래된 세례당에 청동문을 만들어 하느님께 받치기로 한다. ‘이삭의 희생’이란 주제의 공모에서 이탈리아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몰려든다. 공모 결과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최종 결선에 오른다. 피렌체시는 공동 작업을 권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를 노여워해 후배 도나텔로와 함께 도망치듯 로마로 떠나버린다. 17년간 판테온에서 돔 건축술을 공부한다. 그 사이 기베르티는 예수의 생애를 표현한 24개의 부조를 붙인 북문을 21년에 걸쳐 만든다. 이어 동문인 ‘천국의 문’도 27년에 걸쳐 완성한다.
1418년, 이번에는 피오레 성당의 돔 설계 공모가 뜬다. 당시 건축 기술로는 내부 버팀목 없이 43m의 돔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브루넬레스키가 2중 지붕을 제안해 1위를 차지한다. 지난 시절 청동문 공모에서 패배한 브루넬레스키에게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패배자에게 낙인을 찍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것, 이를 통해 끊임없는 경쟁을 이끌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메디치가문 성공의 원동력이다. 기베르티는 2위에 올라 돔 공사를 보조하게 된다. 공모 과정에 ‘브루넬레스키의 달걀’ 일화가 있다. “돔에 대한 구체적 설계도를 제시하라.”라는 요구에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세로로 세워보라.”라고 되묻는다. 아무도 세우지 못하자 브루넬레스키가 달걀 밑바닥을 돌로 깨고 세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는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내가 구체적인 설계도를 제시하면 모두가 돔을 만들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 제시할 수 없다.”라고 반박한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브루넬레스키의 달걀을 익히 들었으리라.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 브루넬레스키도 로마에서 20년 가까이 돔 공부를 했기 때문에 피오레 대성당의 이 거대한 돔을 완성하고, 자신의 이름까지 남길 수 있지 않았나.
돔 공사 초기 기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구상이 말도 안 된다.”라고 비난한다. 기베르티의 태도가 마뜩하지 않았던 브루넬레스키는 아프다는 핑계로 다시 로마로 떠나버린다. 기베르티는 혼자 건설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브루넬레스키가 다시 돌아와 혼자서 공사에 나선다. 진정한 천재가 결판난 셈이다. 무거운 안쪽 천장이 가벼운 바깥쪽 천장을 받치도록 한다. 그 외벽과 내벽 사이엔 좁은 계단을 만들어 무게를 줄여준다. 브루넬레스키만의 기술이다. 그 천재성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게 한다. 줄 서서 힘들게 올라가면 전망대가 고생했다며 주황빛의 피렌체 전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과 회화에서 원근법을 처음 발견한 인물이다. 무거운 자재를 돔 공사장까지 들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비슷한 기계도 발명한다. 돔 공사는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가 후원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메디치가문의 산 로렌초 성당도 건축한다. 산 로렌초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특별한 기법인 ‘반복’을 따르고 있다. 같은 기둥을 반복적으로 세운 것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로마 판테온에서 20년간 돔 건축을 공부하면서 얻은 영감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여기에 더해 청동문 제작 공모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시련이 그 천재성을 키워내는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천재나 영웅은 공통적으로 그런 시련을 겪고 나서야 탁월함, 즉 아레테(Arete)를 발휘하는 것이 전형이다. 그런 천재들이 경쟁하면 인류 역사상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15세기 초 피렌체 예술의 3대 거장인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조각의 도나텔로, 회화의 마사초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를 꽃피운 수많은 천재들. 이들은 하나같이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을 넘나드는 만능꾼이다. 한결같이 ‘파라곤(최고의 경지)’을 향한 경쟁을 통해 불후의 명작을 남긴다. 경쟁은 창조성에 불꽃을 당긴다. 하지만 그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경쟁은 창조성을 오히려 퇴보시킨다. 단순한 경쟁의 승리에 만족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이 아니라 창피한 사람이다. 그래서 파라곤을 향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내가 최고가 됨으로써 나와 경쟁하는 다른 사람도 다 함께 발전하는 그런 경쟁 말이다.
아르노강을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에 다다른다. 언덕에는 청동상으로 만든 다비드상이 우뚝 서 있다.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복제품을 이곳에 세우고, 미켈란젤로 광장이라고 이름 짓는다. 진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박물관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오레 대성당으로부터 다비드 상 의뢰를 받는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다비드 상은 골리앗을 넘어뜨려 제압하는 승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전투에 임하는 의지가 결연한 다비드를 묘사한다. 강한 눈매와 물맷돌을 어깨에 멘 자세. 건장한 남자의 나체다. 다리에 비해 상체와 머리가 유난히 크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이들을 생각해 원근법을 적용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을 위해 제작하다 미완성한 다른 작품도 이곳에 모여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돌을 보면 그 안에 있는 위대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망치와 끌로 뜯어내는 것이란다. 역시 거장다운 말솜씨다. 플라톤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렇게 멋진 말을 하지 않았을까.
미켈란젤로는 1475년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난다. 1566년까지 90세를 산다.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아버지는 공증인으로서 돈을 많이 번다. 영민한 아들이 공증인의 길을 걷길 원한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한다. 13세 때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는다. 천재는 일찍부터 스스로의 재능을 드러내 스승이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단다. 1년만에 싫증을 느낀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배우고 싶다.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 차린 조각학교에 입학한다. 14세의 미켈란젤로는 어느날 늙은 목신의 얼굴을 조각한다. 로렌초가 “노인의 조각치고는 이빨이 너무 가지런하지 않아?”라고 한마디 던진다. 미켈란젤로는 이빨을 뽑아내고 잇몸까지 허물어진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로 바꾼다. 이튿날 이 조각을 본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수소문 해 자신의 양자로 들인다. 한 위대한 예술가가 잉태하는 순간이다.
광장 바로 밑으로는 아르노강이 유유히 흐른다. 왼쪽 저편에서부터 베키오다리, 베키오 궁전 탑, 지오토의 종탑, 피오레 대성당과 거대한 돔 등 주황빛 피렌체 시내가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베키오다리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곳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배경이기도 하다. 다리 위엔 귀금속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원래 푸줏간과 대장간이 있던 곳이다. 다리이면서 시장 역할도 한 곳이다. 다리 위쪽엔 비밀 통로가 있다. 이 비밀통로의 유리창문을 통해 상점들을 훤히 내려다볼 수가 있다. 메디치가문의 구 관저에서 시작해 우피치를 경유해 메디치 가문의 새 관저로 길게 연결되는 통로다.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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