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8.
영국 런던과 이탈리아 여행기5
여행 다섯째 날!
이제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로 간다.
첫 행선지는 교황이 통치하는 바티칸 시국. 13만 평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가톨릭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상상할 수 있다. 로마 시내 테베레강 서쪽 기슭에 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는다.
아침 일찍 바티칸 박물관으로 달려간다. 늦으면 줄이 길어져 관람 시간이 준다. 바티칸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서양 문명 근원의 두 축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유산이 공존한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걸작도 볼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궁전 근처의 포도밭에서 라오쿤 군상이 발견되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조각상을 처음 전시하면서 만들어지게 된다. 소장 유물은 며칠 동안 봐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다.
박물관 1층에는 각종 그림을 모아놓은 회화 전시관,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이집트 전시관, 키아라몬티 미술관, 시스티나 소성당이 있고, 2층에는 에트루리아 전시관, 지도의 방, 라파엘로의 방 등이 있다.
박물관 앞 피냐정원, 아침 일찍 도착했지만 줄이 엄청나다. 입구 건물 벽면 위에선 조각가로서 망치를 든 미켈란젤로와 화가로서 팔레트를 든 라파엘로 부조상이 반긴다.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해야 입장할 수 있다.
안내판 1 | 안내판 2 | 안내판 3 |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홅어본다. 성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데다 정숙이 요구돼 큰 소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안내판을 보고 머리에 담아가야 한다. 이어 바티칸의 유일한 정원인 솔방울 정원에 들어선다. 4미터 높이의 솔방울 조각이 있다. 고대 로마 분수대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바티칸의 늘 푸른 정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박물관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양 옆에는 교황청을 상징하는 공작새가 서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아르날도 포모도르의 ‘천체 안의 천체’가 둥글게 자리해 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을 기념한 조형물이다. 안쪽은 지구를 바깥쪽은 하느님을 뜻한다. 바깥쪽 곳곳은 갈라져 있다. 진보와 과학의 폐허 속에 황폐하고 타락한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지오토,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조 등의 작품이 즐비한 회화관을 지나,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으로 간다. 작지만 위엄있어 보이는 벨레데레의 아폴로 상이 있다. 태양의 신인 아폴로가 활을 쏜 후 과녁에 맞았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다. 인체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얼굴로 활용한다. 조그만 물항아리를 든 채 옆으로 누워 상반신을 들어보인 로마 아르노강의 신 조각상도 있다. 트로이 전쟁 때 뱀에 물려 죽은 역동적인 라오콘 군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라오콘은 아폴로를 섬기는 트로이의 신관이다. 트로이전쟁 때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성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한다. 이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게 두 자식과 함께 살해당한다. 조각은 큰 뱀에게 칭칭 감겨 막 질식당해 죽을 것같은 라오콘과 두 아들의 고통스러운 표정, 근육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15세기 미켈란젤로가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장 폐허에서 발견한 '토르소'도 있다. 토르소는 이탈리아어로 몸통이다. 조각에선 머리와 사지가 없는 흉상을 말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잘려나간 사지를 복원해달라”고 부탁한다. 미켈란젤로는 “지금 모습만으로도 완벽해 더 이상 손 댈 수 없다”며 거절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 되는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원형의 방으로 들어간다. 로마 시내 판테온을 축소한 것이다. 청동 헤라클레스상을 비롯해 로마 황제의 두상과 로마 12신상이 전시돼 있다. 가운데는 엄청나게 커 수영을 못하면 빠져 죽을법한 네로 황제의 욕조가 자리잡고 있다. 붉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지름이 무려 5미터나 된다.
교황의 회랑과 촛대의 방, 아라찌의 방을 지나 라파엘로의 방에 가면 ‘아테네 학당’이 그려져 있다. 예술, 수학, 철학, 신학 등 각 학문을 대표하는 54명의 인물이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라파엘로 등이다.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데모크리토스는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그려졌다.
이어지는 지도 갤러리에는 황금빛 천장 아래 1500년대 이탈리아의 구석구석을 그린 40개가 넘는 지도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정교한 프레스코화다. 16세기 이탈리아 역사가 머리에 그려질 듯하다.
지도의 방 1 | 지도의 방 2 |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곳은 역시나 시스티나 소성당. 1400년 지어진다. 목은 아파오고 어질어질 하지만 천재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인 ‘천지창조’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관람자도 이리 힘겨운데, 미켈란젤로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이 거대한 작품을 정교하게 그리면서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을까? 시스티나 소성당은 말소리도 크게 못 내게 할 뿐 아니라 촬영마저 금지돼 눈으로만 담아올 수 있다. 내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참 아쉬울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태어나 1566년까지 90세를 살다 간 거장이다.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천지창조’는 33살 되던 1508년 율리우스 2세로부터 주문 받는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장소다.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이름이 같았던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이 마치 교황청의 카이사르인 양 권위를 누리려는 욕심이 대단했다. 예배당 천장에 금이 간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 3명을 불러모은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와, 건축가 브라만테, 화가 라파엘로다. 금이 간 예배당 천장을 어찌해야 할까를 묻자, 미켈란젤로의 라이벌로서 건축가였던 궁중 예술가 브라만테가 “제가 약간의 보수를 하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 된다. 그림은 미켈란젤로에게 그리게 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조각가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추천을 하다니. 아마 실패하길 바랐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저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며 여러 번 거절하지만, 교황의 설득에 못이겨 결국 작업에 들어간다. 아래를 커튼으로 가린채. 교황이 보면 당장 그만 두라고 할까봐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
천장 전체를 9개의 틀로 나누고, 다시 34개의 면으로 나눈다. 그림마다 주제가 있다. 천지가 창조되는 순간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그린다.
첫 번째 그림은 빛과 어둠을 나누신 하느님, 두 번째는 해와 달과 식물을 만드신 하느님, 세 번째는 바다의 생물을 만드신 하느님, 네 번째는 아담의 창조, 이 천정화의 백미로 꼽히는 아담과 신의 손끝이 맞닿는 장면.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ET’에서 차용한 바로 그 장면이다. 다섯 번째는 이브의 탄생, 여섯 번째는 선악과를 따 먹고 추방받는 심판, 일곱 번째는 세상에 나와 또 타락한 삶, 여덟 번째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노아의 홍수, 아홉 번째는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노아가 술 먹고 주정부리는 장면이다. 그 주변은 ‘12인의 무녀와 예언자’, 삼각형 형태의 벽과 반월형 벽면은 ‘그리스도의 조상’, 네 모퉁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다. 금기시하던 하나님의 얼굴도 그려 당시 사람들을 경악케 한다. 과연 ‘천지창조’인가? 아니다. 분명 ‘심판’이다. 교황의 명령을 거스른 것이다. 이 시대는 교황청의 타락이 극심했던 시기였으므로, 미켈란젤로는 이를 심판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작품으로 남긴 것이다.
‘천지창조’를 그리는 4년 동안 오로지 혼자서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예상보다 그림이 늦어져 괴팍한 교황의 지팡이에 맞기도 한다. 화를 참다 못해 로마로 도망가지만 교황의 설득으로 다시 작업을 한다. 목을 젖혀 그리기 때문에 목과 허리는 활처럼 휘고, 다리는 절룩이게 된다. 천장의 좁은 공간에서 떨어지는 안료를 맞다 보니 한 쪽 눈이 실명될 정도로 나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라곤(최고의 경지)’을 향한 예술의 극한을 보여준다.
20년 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 제작을 다시 미켈란젤로에게 제의한다. 1541년까지 5년간 철저한 고독 속에 작업에 매달린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한다. 눈, 코, 입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천상과 천국, 연옥, 지옥을 상징한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예수의 몸은 ‘토르소’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예수 옆에는 산 채로 피부가 벗겨져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가 자신의 가죽을 들고 있다. 그 가죽 안에 미켈란젤로의 얼굴이 있다. 벽화작업의 고통을 표현한 듯하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산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받아 고통스럽게 죽는다.
벽화가 공개된 후 다시 한 번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신성해야 할 성인들이 발가벗은 채 등장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날개도 없이 못 생긴 얼굴로 표현돼 이단이라는 비난까지 받는다. 여기에 토를 달아 크나큰 대가를 치른 이가 있다.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 작업 현장을 방문한 체세나 추기경이 “나체가 많이 나와 불경하다. 매춘굴에나 어울릴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려넣어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지옥의 뜨거운 불길 속에 당나귀 귀를 하고 있고, 뱀이 다리를 감싸면서 성기를 물고 있는 채로 서있는 체세나의 모습. 체세나가 교황에게 달려가 구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바오로 3세는 “연옥에만 있어도 어찌 해보겠지만 지옥은 내 권한 밖이네”라고 딴청만 부린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폭군이다.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 아테네 민중을 고통에 빠뜨리게 한 죄로, 이같은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 때는 세상에 왔을 때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 대답해 나체화를 이해해주고 넘어간다. 하지만 나중에 피우스 4세가 ‘비속한 것은 가려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라 다 볼테라라는 화가에게 모든 성기 부분을 덧칠하도록 한다. 볼테라는 이 일로 사람들로부터 ‘기저귀 화가’라는 놀림을 받다 자살한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당 가는 길에 황금빛 ‘천국의 문(시녀의 문)’이 있다. 원래 100년마다 개방하는 문이다. 평생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여론에 50년마다, 25년만다, 점점 여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 2025년 열릴 예정이란다. 이 문을 지나면 모든 죄사함을 받고 천국을 갈 수 있다니, 그 때 다시 올까? 그 때까지 열심히 돈을 모아야겠군.
대성당 입구에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조각한 피에타가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높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이다.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여섯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난 후 피렌체 외곽의 작은 산골마을 세티냐노의 채석장 인부의 손에 자라면서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이리라.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밀라노 사람이 만들었겠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 말에 울그락불그락해진 미켈란젤로는 성당에 몰래 들어가 마리아의 어깨띠에 서명을 남긴다. ‘미켈란젤로가 만듦. 피렌체 출신임’. 그의 서명이 남은 유일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후로 유명세를 탄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선다. 이미 박물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성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한 돔이 시선을 압도했었다. 1506년 지어진 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지만 완공을 보진 못한다. 줄 12개, 직경 42미터의 거대한 돔이다.
대성당에는 베드로가 묻혀 있다. 440년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비 에우도시아의 뜻에 따라 베드로 사도를 묶었던 두 개의 쇠사슬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진다. 하나는 사도가 갇혀 있던 로마의 마메르티노 감옥에서,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감옥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개가 기적적으로 하나처럼 붙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로마의 첫 번째 주교, 즉 최초의 교황이다. 이 때문에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벽 안에 있고 교황의 주거지와도 인접해 있다. 교황이 집전하는 대부분 의식이 열리는 장소다.
발타키노 재단 | 베드로 청동상 |
성당 안, 교황의 제단인 황금빛 천장 아래로 발다키노 제단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아래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성당 오른쪽 벽에는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가슴 높이 정도에 있는 발이 닳아 있다. 발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발을 만져본다. 소원은, 이뤄지면 밝히련다.
성당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종들의 아치 밑에 두 명의 근위병이 성당 외관 입구를 지킨다. 스위스 근위병이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줄무늬 제복에 검정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근위병은 스위스 출신들로만 구성된다.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절인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바티칸 교황청을 침략한다. 이 때 유럽 각국에서 파견된 근위병들에게 사수를 명령하지만 대부분 도망치고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지킨다. 이후로 스위스 용병만 근위병으로 복무할 수 있다.
근위병 앞에는 베드로 동상이 서 있다. 맞은편인 대성당 오른쪽에는 교황이 거주하는 교황궁이 있다. 맨 위층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문이 다른 창문과 달리 빼꼼히 상하로 열려 있다. 교황의 집무실이다. 교황께서 사진 찍는 내 모습을 보고 계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진다.
바로 널찍한 베드로 광장으로 향하니 파란 하늘을 찌를 듯 기다랗게 솟아오른 오벨리스크가 시선을 압도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한 가운데서 마주보고 있다. 베드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의 거대한 열주 회랑은 도리아식 기둥 288개와 벽기둥 88개로 이뤄져 있다. 타원의 지름이 240미터나 된다.
아침 일찍부터 많이 걸었더니 배가 고프다. 이태리 음식점인 로마 Schidione으로 들어간다.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얇게 썬 고기요리. 파스타가 거의 면 밖에 없다. 알리오는 마늘, 올리오는 오일을 뜻한다. 올리브기름에 마늘을 넣고 볶은 파스타. 파스타의 본고장에 왔건만, 맛은 그리 말하고 싶지 않다.
콜로세움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로 옆에 있는 로마인의 광장 ‘포로 로마노’부터 둘러본다. 늪지대를 메워 만들었다. 원로원, 신전 등이 있는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였다. 한때 100만 명이 넘게 살지만, 5세기 로마가 분열돼 공화정이 쇠퇴하고 교황 권력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훼손된다. 얼핏 보면 폐허처럼 보이지만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번성했던 옛 로마의 다양한 흔적들이 겅성드뭇하다.
파란 하늘 아래 에밀리아의 바실리카가 우뚝 서 조화가 잘 이뤄져 있다. 바실리카 앞 광장은 잔디가 푸릇푸릇하다. 기원전 179년 건축된 것으로, 사법, 금융, 상업 등이 이뤄지던 공공건물이다. 바닥에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할 때 불에 탄 주화가 녹은 흔적이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절대 권력을 누리다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바로 포로 로마노다. 원로원 앞 광장의 카이사르를 화장했던 화장터 내부엔 황금색 꽃이 있고 동전들이 던져져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강을 건너 황제가 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며 양아들에게 암살당한다. 멀리 언덕에 시청사로 쓰이는 세나토리오 궁전이 콜로세움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앞에 로마 5현제 가운데 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마치 달려오듯 서 있다. 불의 여신 베스타를 위한 둥근 모양의 아름다운 베스타 신전도 눈에 들어온다. ‘로마는 불이 꺼지면 망한다’ 해서 세운 신전이다. 귀족 가문의 처녀 6명으로 구성된 베스타 제녀들이 1천 년이 넘게 꺼지지 않도록 이 성화를 지켜왔다. 베스타 신전을 지나 로물로스 신전이 있다. 4세기 막센티우스 황제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로물로스를 위해 세운 것이다. 141년 안토니누스 황제가 아내 파우스티나를 위해 세운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도 있다. 포로 로마노를 나가는 길에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콜로세움을 완성한 티투스가 예루살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81년 세운 것이다. 아치 안쪽엔 예루살렘 신전에서 약탈품을 운반하는 부조가 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마지막 유물은 로마인이 좋아한 목욕탕. 현재 복원 중이다.
이제 발길을 콜로세움으로. 로마 최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 이 때부터 그리스 아테네 정복에 따른 영향으로 로마는 세련된 예술의 시대로 접어든다. 68년 네로(37~68)의 자살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끝난다. 이어 후계 자
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평민 출신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39~81)가 황제에 오른다. 평민 황제로서 ‘민중을 위한 것’을 강조하며 지은 것이 콜로세움이다. 네로의 황금궁전 옆 거대한 연못의 물을 빼고 만든다. 80년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된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10만 명의 노예를 데려와 5년만에 뚝딱 해치운다. 고대 로마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검투사나 맹수와의 대결이 300년이나 지속된다.
입구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의 개선문이 있다. 313년 기독교를 인정해 기념한 것이다. 높이 21미터. 로마에서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돼 훗날 파리 개선문의 모태가 된다. 나폴레옹이 통째로 옮겨가려다 실패하자 파리에 같은 규모와 모양의 개선문을 지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 태양신을 숭배했으나,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 312년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던 어느 날, 해거름녘에 높이 걸린 십자가를 본다. 그 옆에는 ‘이것으로 승리하라’라는 글이 있다. 그날 밤 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십자가에 군기를 걸고 싸우라고 계시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말대로 해 연전 연승, 로마에 입성한다. 313년 공동 황제인 리키니우스와 함께 신앙 자유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이후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에 위치한 비잔티움(Byzantium)을 새 수도로 정하고, 330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이름 짓는다.
콜로세움은 지하가 있고, 75미터 높이에 4층으로 구성돼 있다. 경기장은 긴 쪽이 80미터, 짧은 쪽이 50미터 규모다. 5만 명을 수용하는 좌석이 있고 입석까지 하면 7만 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 기술력이 참 대단하다. 이 거대한 경기장을 한꺼번에 관람객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불과 15분. 출입구가 76개나 되기 때문이다. 원형 경기장에 햇빛이 내리 쬐이면 해군 1천 명을 동원해 거대한 천막인 ‘벨라리움’을 친다.
연못의 물을 빼고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엔 지하에서 해전을 치렀다. 해전은 상대가 모두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검투사가 등장한다. 지하는 검투사나 맹수의 대기 장소로 바뀐다. 싸움을 하기 위해 오늘날의 승강기를 타고 올라온다. 콜로세움의 처첨한 역사는 405년 호노리우스(384~423)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하면서 끝난다. 르네상스 시대엔 궁전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재료를 갖다 쓰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는다.
시내를 빙 돌아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인 대전차경기장으로 간다. 황량한 공터지만 영화 ‘벤허’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수용 인원만 25만 명. 4륜마차 경기와 경마, 맹수와의 검투시합 등이 열린 곳이다.
조금만 더 가면 ‘진실의 입’이 있다. 코스메딘 산타마리아델라 교회 입구.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관광명소가 된다. 바다의 신 트리톤의 얼굴이다. 원래는 하수도 덮개였단다. 귀엽게 생겼는데, 삐뚤어진 입으로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이 있다. 손을 넣고 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길다. 그런데 모두 웃는 표정이다. 공포스러워야 맞는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베네치아광장을 버스로 한 바퀴 돈다. 광장 정면에는 이탈리아를 통일한 빅토리아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있다. 이어 이탈리아인들이 사랑을 속삭인다는 ‘나보나 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에스프레소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다. 1유로밖에 안 한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아서 마시려면 7유로를 더 내야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니, 이거야 원 서서 마시는 수밖에. 그나마 세 모금이면 끝이니 다행이다. 양이 이렇게 적으니 1유로겠지.
‘나보나 광장’에는 세 개의 분수가 있다. 양쪽에 있는 ‘넵튠(포세이돈)의 분수’와 ‘무어인의 분수’도 볼만 하지만 중앙에 있는 베르니니의 ‘강의 분수’가 유명하다. 베르니니는 바티칸 대성당의 광장을 만든 천재 바로크 조각가다. 중앙에 있는 높이 17미터의 오벨리스크는 도미티아누스 시절 로마에서 만든 것이다. 이 분수에 있는 네 개의 거대한 거인상은 각각 인도의 갠지스 강, 독일의 도나우 강, 이집트의 나일 강,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라플라타 강을 상징한다.
광장을 빠져나와 모든 신에게 바쳐진 판테온으로 향한다. 둥근 지붕 ‘쿠폴라’가 온통 금박으로 덮여 태양처럼 눈부시다. 원통형 벽체 위에 올라가 있는 쿠폴라는 위로 갈수록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기둥이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흙과 돌 만으로 이런 지붕을 만들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다만 당시 기술로는 천장을 모두 닫을 수 없었다. 만약 닫았다면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붕 한 가운데는 지름 9미터 규모로 뻥 뚫려 햇빛이 그대로 들어온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건물 내부로 비가 온다. 훗날 브루넬레스키가 이곳에서 무려 17년간 돔 건축술을 공부해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한다.
판테온 신전은 25년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지어 바친 것이다. 지금도 성당으로 쓰이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건축물 가운데 원래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빅토리아 엠마누엘레 2세와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 라파엘로가 묻힌 곳이다.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름참에 트레비 분수에 도착한다. 트레비는 3거리란 뜻이다. 분수 앞 광장이 세 갈래 길이 모이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수 옆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신다. 여기는 테이블 비용이 5유로다. 나보나 광장보다 싸긴 하지만 서서 마신다. 고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트레비 분수를 ‘처녀의 샘(Aqua Virgina)’이라 칭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에 따라 분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도망이 있었다.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하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이 파괴된다. 이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15세기 이후 새로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된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최고 걸작품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에서 주인공인 마스트로이안니와 여주인공이 분수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어 유명해진다. 분수 중앙에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부조물이 있다.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테베레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바다의 신을 조각해놓았다. 분수 왼쪽 날뛰는 말은 풍랑을, 오른쪽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뒤 배경건물 제일 위에는 라틴어로 ‘CLEMENS VII’, 그 아래 ‘처녀의 샘분수’라는 뜻의 ‘AQVAM VIRGINEM’이 새겨져 있다. 양쪽 4개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
동전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세 번 던진다. 첫 번째는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두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세 번째는 그 사람과 결혼을 바라는 것을 뜻한다. 사진은 오른손이 왼쪽 어깨너머에 있을 때 찍는 것이 좋다. 날이 어두워진 탓에 던져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나는 꼭 던졌어야 하는데. 이번이 로마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겠지?
이미 어두워진 밤 스페인광장 대사관 앞을 걷는다. 로마 시내에서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곳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배경으로 나온 ‘스페인 계단’ 주변이 유명하다. 주변이 석조 건물로 에둘러져 자연공명을 이루기 때문에 공연자들이 몰리는 장소다. 화려한 브랜드 부티크가 많은 로마 제일의 쇼핑 구역이기도 하다. 첫 블록에 5천만 원에서 1억 원에 이른다는 IWC시계도 있다. 쇼윈도 밖에서 아이쇼핑만 하고 발길을 돌린다.
까르보나라와 닭고기 요리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꿈에 그리던 오페라 극장으로 간다. 로마 국립 오페라극장(Roma Teatro dell’Opera)에서 오후 8시 ‘리골레토’ 관람. 관람료는 115유로, 원화로 15만 원 정도다.
로마 국립 오페라극장은 1880년에 만든 후기 바로크 시대의 특성을 담은 건축물이다. 오디토리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명실이 되도록 설계됐다. 세계 최고의 음향 수준을 자랑한다.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나폴리 산카를로극장과 함께 이탈리
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힌다. 자코모 푸치니의 ‘토스카,’ ‘투란도트’, 카미유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 등 중요한 작품의 초연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오페라 ‘리골레토’는 가장 비극적인 오페라 가운데 하나다. ‘꼽추’에 ‘병든 몸’의 왕실 ‘광대’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의 문란한 사생활을 부추긴다. 3중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세상을 저주한다. 약한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공작을 타락시키면서 즐거움을 얻는 악역이다. 딸 질다에게 만큼은 따뜻한 아버지다.
만토바 공작은 첫 아리아 ‘이 여자나 저 여자나(Questa o quella)’로 호색한의 면모를 보인다. 리골레토를 저주하는 귀족들은 질다를 리골레토의 정부로 오해하고 납치해 공작에게 바칠 계획을 세운다. 질다는 교회에서 학생으로 신분을 감춘 공작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리골레토를 저주하던 귀족들은 질다를 그의 정부로 잘못 알고 납치해 만토바 공작에게 데려간다. 납치된 딸을 찾던 리골레토는 공작에게 이미 능욕당한 질다를 발견한다. 질다에게 광대 복장의 미천한 모습을 들킨 순간 리골레토는, 질다가 자신의 딸임을 밝힌다.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 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에게 일을 맡긴다. 그 사이 만토바 공작은 스파라푸칠레의 집에서 마달레나를 유혹하기 위해 칸초네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을 노래한다. 질다가 이를 목격한 장면에서, 네 명의 서로 다른 감정이 표현된 4중창 ‘아름다운 아가씨여(Bella figlia dell'amore)’가 흐른다. 마달레나를 유혹하는 공작과 이를 즐기는 마달레나, 집 밖에서 딸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는 리골레토와 공작의 호색한 면모를 알게 된 질다. 이 모든 장면이 뒤섞여 있다. 이어 공작을 사모하는 스파라푸칠레의 여동생 마달레나가 오빠에게 간청해 자신의 집에 처음 오는 남자를 죽이기로 한다. 이를 엿들은 질다는 공작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결국 남장을 해 죽임을 당한다. 공작의 시신으로 믿고 있던 리골레토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마음’ 노랫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자루를 열어본다. 질다다. 질다는 자신의 잘못을 빌면서 천국에 가 리골레토의 행복을 빌겠다고 말한다. 리골레토는 질다의 죽음에 “저주구나!”라고 외치며 쓰러진다. 부녀의 2중창이 비극적 피날레를 장식한다. 리골레토는 결국 세상을 향한 모든 저주의 화살을 되돌려받은 셈이다.
마지막 2중창이 다소 논리적으로 무리한 전개다. 이미 죽었어야 할 질다가 리골레토와 함께 중창을 하고 나서 죽다니. 이는 베르디의 작품 의도 때문이다. 중창을 결정적인 화해와 이해의 순간으로 절묘하게 활용한 것. 부녀의 마지막 이중창 덕분에 ‘리골레토’가 명작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샤를 구노도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원작을 바꿔가면서까지 로미오의 죽음을 유예시키면서 ‘슬퍼하지 마오, 가여운 연인이여’ 이중창으로 마무리한다. 중창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는 점에서 우리 인생과 닮아있다. 인간의 삶이 원래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아
니잖은가? 사랑이든 미움이든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것. 2중창, 그 소통의 미학이 필요한 때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앞에서 독창을 부를 것이 아니라 함께 중창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29개 오페라 중 16번째 작품이다. 프랑스 무대에 오른 빅토르 위고의 연극 ‘방탕한 왕’이 원작이다. 16세기 프랑스 군주 프랑수와 1세의 방탕함과, 이를 부추기는 왕궁의 곱사 광대 트리불레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연극 공연은 바로 금지된다.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록 다른 나라 왕이긴 하지만 왕조국가에서 리골레토 공연은 허락되지 않는다. 베르디는 프랑스 왕국을 이탈리아의 멸족한 만토바 공국으로 바꾼다. 여전히 엽기적이고 외설적인 장면이 검열에 걸려 많은 장면이 삭제된 채 ‘저주(La Maledizione)’라는 제목으로 초연 한다. 이 역시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한다. 이후 ‘리골레토’로 제목을 바꾸고, 지금은 베르디의 3대 걸작으로 꼽히면서 성탄절이나 연말연시 특별공연의 주요 작품으로 상연되고 있다. 원작자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희곡이 오페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공작과 질다, 마달레나, 리골레토의 4중창 ‘아름다운 아가씨여’를 보고 오페라에 반했다고 한다. 리골레토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단연 발랄한 리듬과 경쾌한 멜로디의 ‘여자의 마음’.
'여자의 마음은 깃털과 같아서 목소리도 마음도 쉽게 변하지...여자의 마음은 다 그래...여자를 믿는 남자는 비참해지지 방심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면 안 돼...여자의 마음은 다 그래, 다 그래'
가사는 프랑수아 1세의 4행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베르디는 이 아리아가 초연 전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연 직전까지 배우들에게까지도 비밀을 유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페라는 작품을 뜻하는 라틴어 오푸스(opus)의 복수형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온갖 산물이 작품일 텐데, 그 일반명사를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는 장르다. 인류가 만들어낸 것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오페라를 처음 보는 사람은 어렵다고 하지만 반복해 볼수록 점점 빠져든다. 중독성이 강한 예술이다.
오페라를 즐기려면 공식을 알아야 한다.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가 빅토리앙 사르두의 연극에서 소재를 얻어 작곡한 오페라 ‘토스카’는 교과서적이어서 1900년 로마에서 초연한 이래 100년 넘게 사랑받는 명작이다.
오페라의 기본공식은 우리나라 신파극인 ‘장한몽’과 비슷하다. 이수일과 심순애 사이에 돈 많은 김중배가 끼어들어 삼각구도가 끝까지 이어진다. 오페라도 삼각구도다. 토스카에서 여주인공 토스카는 오페라 가수다. 소프라노다. 소프라노 여주인공을 ‘프리마 돈나’라고 부른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화가 카바라도시. 테너다. 토스카에게 음흉한 욕정을 품고 있는 경찰총경 스카르피아는 바리톤이다. 소프라노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성상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소프라노가 사랑하는 남자는 꼭 테너다. 청중을 열광시키는 힘과 호소력이 다른 파트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가장 인기가 있는 역이다. 하지만 더 남자다운 목소리는 바리톤이다. 테너는 바리톤보다 남자답지는 못하지만 젊음을 상징한다. 성숙하지 못하고 다혈질적이며 성급한 판단과 행동으로 소프라노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남자다.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시는 스카르피아의 간계에 말려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 토스카도 신 앞에서 다시 만나자며 따라 죽는다. 바리톤들이 하는 농담이 있다. 무대 위에선 소프라노가 테너 품에 안기지만 공연이 끝날 때는 바리톤의 손을 잡고 나간다고.
오페라의 아버지 베르디는 휴머니스트다.
“나는 항상 완벽을 위해 몸부림친다. 내 최고 작품이 뭐냐고? 그건 바로 다음 작품이다.” 베르디의 말이다. 대작을 많이 만들어놓고도 베르디는 기존의 것을 뛰어넘을 다음 작품을 위해 혼신을 기울인다. ‘파라곤’을 향한 경쟁이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오텔로... 오페라의 최고 명작들이 베르디 손에서 탄생한다. 그 힘은 휴머니즘에 있다. ‘돈 카를로’가 대표적이다. 가슴을 짓누르는 비통한 감동 때문에 며칠 밤을 뒤척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왕실 실존인물들이다. 주인공 돈 카를로는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자였으나 부왕의 미움을 받아 독방에 감금된 채 겨우 23살에 죽는다. 스페인판 사도세자다. 아니,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18세기 인물이니, 사도세자가 조선판 돈 카를로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비정한 부왕은 필리포 2세.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끈 주인공이다. 여기까지는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와도 비슷하다. 필리포 2세는 평생 웃은 적이 거의 없는 근엄한 인물이다. 여주인공은 엘리자베타. 스페인과 프랑스 간 정략결혼에 따라 스페인 왕실로 출가한 프랑스 공주다. 엘리자베타의 원래 약혼자는 돈 카를로. 그런데 필리포 2세는 두 번째 아내가 죽자 새 왕비로 아들의 약혼녀인 엘리자베타를 선택한다.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에볼리 공녀라는 여인도 등장한다. 애꾸눈이지만 당시 마드리드 최고의 절세미인. 왕의 정부이면서, 그의 아들인 돈 카를로를 유혹하니 전형적인 팜므파탈, 즉 요부다.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뜻하지 않은 여인의 사랑과 맞대야 하는 돈 카를로. 그의 참담한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인물이 있으니 로드리고 후작이다. 돈 카를로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왕실의 신뢰도 받는다. 주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쉴러가 창조한 인물이다. 오페라에서 돈 카를로와 엘리자베타는 운명적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억눌러야 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받는 주인공이다. 로드리고만이 그들 편이다. 필리포 2세와 에볼리 공녀는 이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일종의 악역이다. 필리포 2세는 결국 돈 카를로와 엘리자베타의 관계를 의심한다. 이 때문에 세계 최강 스페인의 국왕이면서도 아내로부터도, 아들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에볼리 공녀는 질투심 탓에 엘리자베타를 모함하다 뒤늦게 참회하면서 새로운 인격체로 거듭난다. 이렇듯 베르디는 모든 인물을 심지어 악역에게도 따스한 시선으로 처리하면서 전형적 악역구도를 깨버린다. 누구나 인간적인 고통을 지니고 있으며 구원받아야 할 고귀한 인격체라는 인간관을 보여준다.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이야말로 세월을 초월해 히트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제임을 베르디는 증명한다. 막장 복수극이 판치는 우리네 TV 드라마를 보면, 인기에만 몰입한 나머지 작가정신의 결여가 빚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돈 카를로와 엘리자베타는 실제로 사랑했을까? 정사에 의하면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숨기고 싶은 일을 감추는 것이 정사다. 당대부터 두 사람의 사랑은 야사로, 민담으로 널리 전해온다. 돈 카를로는 1568년 7월 죽는다. 동갑인 엘리자베타가 죽은 시점은 돈 카를로가 죽은 지 불과 70일 후다. 아이를 유산하고 죽지만, 옛 약혼자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탓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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