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29.
스페인 여행기 4
간밤에 피곤했던지, 헤밍웨이 꿈을 꾸었음 직한데 당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아직 가지 않은 새로운 여행지 세비야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로, 과달키비르강이 흐르는 평야 지대다. ‘과달’은 크다는 뜻이다. 스페인의 강 이름에 흔히 들어가 있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지배할 당시 수도였고, 16세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중심으로 한 신대륙 발견 시대엔 식민지 건설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신대륙에서 금, 은 등을 거두며 부를 축적, 스페인 최고의 화려한 도시로 떠오른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다음으로 네 번째 큰 도시로, 스페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아침 일찌감치 스페인광장으로 간다. 세계에 스페인광장은 참으로 많다.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도 있고,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도 있다. 그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세비야의 스페인광장. 1929년 스페인-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니발 곤살리스가 설계해 지어진다. 먼저 건물 규모에 압도된다. 웅장하고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질 만하다. 평일이어선지, 관광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좋다. 마음대로 갈고 다닐 수 있으니. 단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시간뿐. 건물 내부는 볼 새 없이 바깥에서만 한참을 살피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반달 모양의 광장을 둘러싼 건물 양쪽에 탑이 있고, 건물 앞은 인공적인 냇물이 흐른다. 광장 한가운데선 시원하게 분수를 내뿜으며 그 웅장함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활꼴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아르데코 유럽 양식에 신 무데하르 이슬람 양식이 디테일하게 들어가 있다. 건물에는 스페인 남부 특유의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58개의 벤치가 있다. 스페인의 주요 도시 58개를 상징한다. 벤치마다 도시 이름과 휘장, 역사, 지도 등이 새겨져 있다.
모두 찍을 순 없어 카디즈, 바르셀로나, 세비야, 그라나다 정도만 사진에 담아본다. 건물 전경도 찍고 싶은 욕심이 난다. 워낙 기다란 반달이기에 한 컷에 담기 힘들지만, 파노라마 형식을 빌려 담아봤다. 일행들을 양쪽 끝에 동시에 모아보는 재미가 있어 좋다. 사진 찍는 사이 자꾸 마차와 다른 관광객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더운 날씨에 모델들이 양 끝으로 여러 차례 달려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완성된 사진을 보여주니 다들 대만족이다. 이곳에서 김태희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며 찍었던 광고보다 값진 사진이 아닐지 싶다.
내 생각일 뿐인지는 몰라도. 이곳은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로마에 항전하던 누만시아의 최후 모습을 그렸다는 ‘소리아’를 찾아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광장 맞은편 마리아 루이사 공원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린 후 이제 세비야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는 길에 세계 최초라는 담배공장도 있다.
세비야 대성당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그들의 사원 자리에 세워졌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무려 120년 동안이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간다. 하기야 유럽의 거의 모든 대성당이 그렇긴 하지만. 긴 세월의 무게처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 이슬람의 흔적까지 고루 섞여 있어, 198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대성당의 히랄다탑에서부터 걸어간다. 간간이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지나친다.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 보니, 마차 탄 관광객이 부럽기만 하다.
한쪽 도로에는 관광도시답게 트램도 다닌다. 세비야의 상징인 히랄다탑은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족이 만들었다.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너무 아름다워 헐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꼭대기에 십자가만 설치했단다. 높이 98미터에 28개의 종과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다. 탑의 이름 ‘히랄다’는 풍향계를 뜻한다.
히랄다탑을 지나 대성당으로 가기 전 더위도 식힐 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잠시 쉬어간다. 쉬다 보니 배도 고파온다. 세비야 맛집으로 소문난 대성당 정문 맞은편 ‘바카오’로 달려간다. 초리조와 고추장 고로케, 고기와 소스가 조화로운 비리오슈 빵 등등.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그만 코카콜라가 흥미롭다.
이제 성당 안을 즐길 시간. 오렌지 나무가 가득한 사각의 정원을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간다. 대성당은 동(막대기의 문, 종들의 문), 서(세례의 문, 주문), 남(성 크리스토퍼의 문), 북(안식의 문, 도마뱀의 문, 성소의 문, 용서의 문), 총 네 개의 파사드를 가지고 있다. 네 개의 파사드에는 모두 합쳐 15개의 문이 있다는데, 어디로 들어간 지는 잘 모르겠다. ㅠㅠ
성당 안은 당시 세비야의 부를 상징하듯 온갖 작품과 보물로 가득하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세비야의 수호성인인 성녀 후스타와 루피나가 히랄다탑을 붙잡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데, 서둘러 돌아다니다 보니 이를 놓친 것 같다. 아니, 보고도 몰랐을까? 세비야 스페인광장에서도 '소리야'를 보지 못하고 왔는데. 역시 여행 전에 공부를 철저히 해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후회를 남긴다.
두 자매는 세비야 출신으로 로마 시대 가톨릭 순교자다. 비너스가 사랑했던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리는 행사에서 후스타와 루피나는 비너스 추종자와 언쟁을 벌이고, 결국 비너스상을 부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고 개종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세비야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맨발로 걷는 형벌을 겪으면서도 개종을 거부한다. 후스티아는 감옥에서 숨지고, 루피나는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와 함께 갇히지만, 사자가 해치지 않자, 로마군 대장 디오 게니아누스가 목을 베어버린다. 1755년 세비야에 큰 지진이 나 많은 탑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후스타와 루피나가 히랄다탑이 무너지지 않게 양 옆에서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설이 전해져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입구에 성 조지 수호신이 있고 베개 2개를 베고 누워있는 주교의 무덤도 있다. 베개가 여러 개일수록 신분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 벽면에 걸린 성 안토니오 그림엔 재밌는 일화가 있다. 무리오의 작품인데 도굴꾼이 훔쳐 간 것을 되찾아왔단다. 그래선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잘린 부분이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의 중앙재단 천장은 황금빛이다. 무려 금 1톤이 들어갔다.
화려한 성전 맞은 편 대성당의 보물인 콜럼버스 묘는 웃프다.
네 개의 조각상이 그를 받쳐 세우고 있다. 15세기 4개 왕국, 즉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왕들이다. 콜럼버스는 “죽어서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라는 유언을 남긴 탓에 쿠바가 독립하면서 그의 유해를 스페인으로 안치할 당시 4명의 왕이 그의 무덤을 짊어지게 한 것이다. 콜럼버스 항해를 전폭 지지한 카스티야와 레온의 이사벨, 페르난도는 고개를 든 당당한 모습이고, 반대했던 두 명의 왕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른쪽 레온왕 페르난도의 창살 아래에는 그라나다를 뜻하는 석류가 꽂혀 있다.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것을 의미한다. 왕들이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문장이 해당 왕국을 의미한다. 오른쪽 레온왕의 발과 왼쪽 카스티야 왕의 발이 유난히 반짝인다. 그 발을 만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세비야에 다시 온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관 뒤에는 여행자의 성인인 크피스토퍼가 그려져 있다.
이제 5년 된 신상이 있는 도시재생의 현장 메트로파라솔을 만나러 간다. 여름 한낮 더위를 피해 세비야 시내 골목골목 음지를 찾아 한참을 걸어간다. 마차를 탔어야 하는데, 이 더운 여름날 참 고생이다.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인 ‘메트로폴 파라솔’을 보러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도 멀다. 가는 길에 과달키비르강 강가에 있는 이슬람 양식의 황금의탑에서 잠시 한눈을 판다. 야자수와 탑의 조화가 이국적이다. 12각형의 군사 망루로, 세비야 전성기를 상징한다. 1248년 세비야를 점령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황금의탑이라 불렀단다. 중세엔 감옥이었고,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쓰인다.
강 건너편에는 은의탑이 있어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해 세비야로 들어오는 배를 막았다고 한다. 근데 은의탑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중세 시대의 것일까? 왠지 항해를 떠날 것만 같은 분위기의 함선이 강 가장자리에 둥둥 떠 있다. 그 뒤로 멀리 이사벨다리가 있는데, 에구에구 나무에 가려 사진에선 안 보인다. 대항해시대에는 이곳으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식민지에서 약탈해 온 금은보화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때의 영광과 함께 강물은 계속 흐르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반짝거리면서. 높게 뻗은 야자수만이 이 광경을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해 오래 머무르고 싶지만, 갈 길이 바빠 걸음을 재촉한다.
또다시 따가운 햇살을 피해 음지로 음지로 골목길을 한참 동안 걷는다. 크리스토 데 부르고스 광장의 무화과나무를 지나 웅장한 메트로폴파라솔에 도착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버섯인 듯 벌집인 듯 목조건축물에 다다른다. ‘메트로폴 파라솔’. 버섯을 닮아‘세비야의 버섯’, 즉 ‘라스 세타스 전망대’라고도 불린다. 6개의 버섯 모양으로 높이 150m, 길이 70m, 넓이 30m에 이른다. 독일 건축가 위르겐 메이어가 만들었다. 세비야 대성당의 둥근 천장과 방금 지나친 크리스토 데 부르고스 광장의 무화과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세비야가 북부 도시 빌바오의 도시재생 성공 모델로 손꼽히는 ‘구겐하임 미술관’ 효과를 노린 것이다. 빌바오는 과거 철강 도시에서 몰락한 소도시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운명이 달라진다. 도시 인구의 세 배에 가까운 100만 명의 관광객이 매년 이 도시를 찾는다. 랜드마크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지역 경쟁력을 끌어올린 이른바 ‘빌바오 효과’다. 빌바오는 북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네르비온강에 인접한 지리적 요건상 조선업이 번창한 도시였다. 하지만 1980년대 아시아 국가들이 조선업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도시도 몰락한다. 그래서 ‘문화관광산업’으로 눈을 돌린다. 미국 구겐하임 재단이 새 구겐하임 미술관을 짓기 위해 자리를 물색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빌바오시는 구겐하임 재단을 만나 상징적인 건축물을 빌바오에 짓자고 제안한다. 도시가 새로 태어나려면 ‘문화’가 살아나야 하고, 혁신 건축물의 힘이 필요하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국 건축이 추진되고 기둥이 없는, 기존에 없던 건축물이 탄생한다.
미술관 외관에는 0.3밀리미터 두께 티타늄 3만 3천 개를 이어 붙인다. 그 무게가 60톤에 달한다.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며 웅장한 선박 같기도 해 조선업이 호황이던 과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성도 지닌다. 잘 지은 건축물 하나가 도시 운명을 바꾼 셈이다.
세비야는 엔카르나시온 광장 재개발 공모를 통해 독일 건축가 위르겐 마이어 헤르만의 디자인을 2004년 선정했다. 커다란 버섯 모양의 6개 기둥이 웅장한 구조물을 받치는 형상이다.
주변 평범하고 오래된 성당 등 상권을 빨아들이며 현지인에게는 오히려 도심 재생 실패작으로 치부되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다시 오고 싶은 멋진 건축물이다. 내외부가 자연스럽게 열린 공간을 만들어 주변 경관을 끌어안는 느낌을 준다. 1층은 카페 등 여행객의 주머니에 집중하고, 지하는 개발 당시 발견된 고대 유물을 그대로 보존한 박물관이 있다. 멀리서 메트로폴파라솔을 바라보는 곳 바닥엔 마치 예술작품처럼 가스관이 매설돼 있다는 표시가 있다. 이런 것도 아름다워 보이다니, 여기가 유럽이 맞구나 싶다.
다음 여행지는 세비야 근교의 소도시 코르도바. 세비야의 한낮 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걸어 다녀 피곤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부터 관광을 즐기기 위해 바로 이동한다. 코르도바 구시가지에 숙소를 잡았는데, 로마다리를 걸어서 건너가야 한다. 시내 교통체증이 심해 버스가 들어갈 수 없단다. 피곤한 몸에 캐리어까지 끌고 로마다리를 건너간다.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잘 보전돼 있다. 과달키비르강을 사이로 나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지어졌다. 다 건너니 끝에 칼라오라탑이 있다.
로마다리를 요새화한 탑이다. 구시가지로 들어서 메스키타가 마주 보이는 엘 컨퀴스타도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가지를 거닐어 본다. 길이 아주 좁아 차도 못 다닐 정도다. 오래된 나무 문이 달린 하얀 주택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오히려 편안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아이쇼핑도 하고, 천하무적이라 불리는 코르도바 장군의 기마상도 사진에 담아본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가 샹그리아 한 잔을 기울인다. 돌아오는 길에 주택 위에 떠오른 둥근 달이 너무 예쁘다. 스페인에선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코르도바는 기원전 169년 로마의 집정관 클라우디오 마르셀로가 건설해 로마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세네카 등 많은 철학자를 배출했다. 이후 서고트족에 장악됐다가, 8세기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시절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구실을 하며 또다시 황금기를 맞는다. 당시 가장 앞선 교육시스템을 자랑,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한다. 1078년 이웃 세비야의 침략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1236년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에 정복되며 쇠퇴한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는 동안 아랍 본토에선 압바스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칼리프 지위를 빼앗긴 옴미아드 왕조의 압달 라흐만이 750년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와 코르도바에 정착한다. 756년 새 이슬람국가인 알 안달루스를 세우고 자신을 압달 라흐만 1세라 칭한다. 안달루스는 ‘반달족이 넘어온 땅’이라는 의미인 반달루스의 아랍어식 표현이다. 후에 스페인 남부지방 안달루시아의 어원이 된다. 당시 수도 코르도바는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의학이 발달해 가톨릭 왕국 왕과 귀족이 몰래 코르도바에 와 수술을 받기도 한다. 두개골을 여는 수술까지도 가능했단다. 후에 들어온 알모아데 왕조 때는 세비야가, 이베리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나사리 왕조 때는 그라나다가 눈부신 발전을 한다. 외모, 종교, 언어 등 유럽인과 공통점이 없었던 이슬람인이 이베리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지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종교적 관용. 교파 간 교리 차이에 민감했던 가톨릭과 달리 ‘섬기는 모습만 다를 뿐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은 오직 알라’라는 사상 아래 종교가 다른 사람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진 않는다. 다른 종교를 믿으면 종교세 명목으로 인두세를 거둔 것이 차별이라면 차별. 이 때문에 유럽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이베리아로 흘러들어온다. 이들은 이슬람 치하에서 산업의 중추이자 사회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이베리아에서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가 어우러진 유례없는 혼종성을 띄면서 인종적·문화적 용광로가 만들어진 셈이다. 종교 간 개종도 활발해져 ‘모사라베(이슬람 지배 하에 살던 가톨릭인)’, ‘몰라디(가톨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 ‘모리스꼬(가톨릭의 재정복 이후 이슬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 ‘무데하르(가톨릭의 재정복 후에도 남아 살던 이슬람인)’ 등의 명칭이 생겨난 것도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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