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1.
스페인 여행기 6
호텔에서 눈을 뜨자마자 산책길에 나선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느 한 곳이라도 더 눈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발길이 닿은 곳은 스페인광장.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오드리 햅번의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스페인광장을 거닌 기억이 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이곳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엄청난 규모의 스페인광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에 서 있다. 마드리드 최고 번화가인 그란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있다. 1930년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기념비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기념비 중앙에는 외팔이 세르반테스가 오른손에 책을 든 채로 앉아 있다. 그 앞에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가 "내게 왔느냐?”고 손짓하고 있다. 또 그 옆엔 당나귀를 탄 산초 판사가 따르고 있다. 탑의 맨 꼭대기는 '돈키호테'를 읽은 사람들이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박물관 스러워 사진에 담아본다. 유럽은 어디를 가든 그렇다.
호텔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마지막 여정에 나선다. 호텔 엘리베이터 문이 특이하게도 이중문이다. 엘리베이터 자동문이 열린 후 수동문을 열어야 나갈 수 있다. 처음엔 "왜 문이 안 열리지?"라며 당황했는데, 한 두 번 타 보니 익숙해졌다.
엊그제 스페인에 들어온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제 스페인을 떠나야 할 시간. 마지막 행선지 프라도미술관으로 가는 동안 스페인의 근현대사를 떠올려 본다.
1700년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놓고 유럽 왕조 국가들 간 쟁탈전이 시작된다. 오랜 다툼 끝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승리해 펠리페 5세가 국왕이 된다. 유럽의 주도권이 프랑스로 넘어간 셈이다. 이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1702년 프랑스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된다. 13년간 이어지면서 유럽 전체로 확대된다. 먼저 펠리페 5세가 마드리드에서 탈출하고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1710년 카를로스 대공이 마드리드에 입성한다. 이때 영국은 스페인 편을 들며 지브롤터를 손에 넣으면서 영국령을 선포한다. 지브롤터는 지금도 여전히 영국령이다. 그러나 동맹국은 카를로스가 오스트리아 왕위도 계승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하나가 돼 막강한 힘을 누릴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펠리페 5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스페인 국왕 자리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 펠리페 5세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스페인 왕좌만 차지한다. 이에 유럽은 세력 균형을 이뤘지만, 스페인은 소유했던 영토를 많이 잃고 큰 타격을 받는다. 프랑스에 불신을 품었던 카탈루냐 지역에선 합스부르크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지지하다 결국 항복한다. 이렇게 스페인 전체를 통치하게 된 부르봉왕가의 펠리페 5세는 각 왕국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를 위한 기틀을 다진다.
1805년 유럽은 나폴레옹 1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해상권력은 여전히 영국이 차지하고 있다. 영국이 해상을 봉쇄해 프랑스를 견제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편성한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함대에 패한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점령하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 즉 호세 1세를 국왕으로 앉힌다. 하지만 스페인은 강력하게 저항한다. 민중이 무기와 몽둥이를 들고 매복했다가 불시에 나타나 나폴레옹 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게릴라 전술은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잘 아는 토착 세력이 외세에 저항하는 가장 유용한 전술 중 하나로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9년 프랑스군은 스페인 대부분을 장악해 버린다. 결국 영국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를 철수시킨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유폐시킨 페르난도 7세를 1814년 욍위에 올린다. 또한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시기, 스페인 민중들이 모여 카디스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앞으로 왕은 의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스페인 최초의 민주헌법이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페르난도 7세는 이 카디스 헌법을 완전히 무시한다. 때문에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이 증폭돼 내전이 발생한다. 이 시기 유럽을 휘감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물결 속에서 스페인 또한 기나긴 이념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혼란이 이어지던 1868년 이사벨 2세가 도주하면서 스페인에는 급진 자유주의자의 정권이 시작된다. 1869년 왕의 계승자를 찾으라는 임무를 맡은 프림 수상은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오를 지명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다. 하지만 아마데오를 지지하던 프림 장군이 암살되고, 외국 출신 왕을 반대하는 자들이 난무한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고통받던 아마데오가 결국 1873년 퇴위를 선언한다. 그러자 의회는 투표를 통해 스페인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1년도 안 되는 기간 4명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등 심각한 무질서 상태가 이어진다. 그래서 스페인 제1공화국은 1년 만에 붕괴하고 1874년 알폰소 12세가 부르봉왕조를 회복해 스페인은 입헌 군주국이 된다.
1898년 쿠바 문제로 미서전쟁이 발발한다. 패배한 스페인은 마지막 식민지였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과 괌을 미국에 넘겨준다. 미서전쟁 이후 두 국가의 운명은 극과 극을 달린다. 신흥국가 미국의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면서 마치 지는 해로 전락한 스페인이 미국에 바통을 넘겨주는 형국이다.
미서전쟁의 패배는 스페인 국민에게 큰 상처를 준 반면 새 민족정신을 불타오르게 한다. 국제사회에서 위축된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스페인 국민은 그들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고, 지성인들은 나라의 문제의식을 문학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후 1939년 세계대전 못지않게 주변국들이 대거 참전하는 내전에 빠져든다.
이제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점을 찍어야 할 순간이다. 프라도미술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와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8세기 자연사 박물관을 지으려 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완공하지 못한다.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천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개관한다. 왕들이 취향에 따라 수집한 작품, 왕실 화가의 그림, 왕실 소유 건물에 걸려 있던 작품을 공개하는 공간이다. 현재는 3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이 중 3천여 점만 전시하고 있다.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고야, 3대 거장의 전시관이 대표적이다. 티치아노, 루벤스,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의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검색대에서 엑스레이 촬영 후 입장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금지돼 멋진 작품들을 눈으로만 담아야 한다. 미술관을 관람하는 동안 멋진 그림을 감상하고, 가이드로부터 큐레이터보다 훌륭한 해설을 듣는다. 미술 사조엔 문외한인 데다, 기억마저 가물가물해 당최 쓸 말이 없어 마무리를 흐지부지 할 수밖에.
글을 쓸 때 처음 시작이 거창하고 내용이 자꾸 길어지다 보면 끝은 흐리멍덩하게 매조질 때가 왕왕 있다. 대문호들도 그런다는데, 나야 별수 있겠나 하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다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고행길에 나선다. 영하 52도를 밑도는 1만 미터 상공에서 무려 12시간여를 날아간다. 그사이 파리, 나폴리, 테살로니카, 이스탄불, 트빌리시, 바쿠, 우르겐치, 알마티, 우루무치, 장자커우, 베이징, 톈진까지 참으로 많은 도시 상공을 지나 인천에 도착한다.
게으른 탓에 몇 달째 쓰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다, 결국 해를 넘기고서야 반 년여만에 글을 끝맺는다.
여행의 끝은 집으로 되돌아온 때가 아니라 여행의 추억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때라고 하니, 난 지금도 여전히 스페인을 여행 중이다.
참, 그라나다에서 잃어버린 일행의 캐리어는 한 달쯤 후 홀로 미국 여행까지 마치고 돌아왔단다. 주인과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암튼 마무리가 잘 돼 다행이다.
좋은 사람들과 멋진 곳에서 행복한 추억과 인연을 쌓은 것이 사진을 통해 지금도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이제 또 누구와 함께 언제 어디로 떠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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