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7.
스페인 여행기 2
스페인에서의 첫 여명이 밝아온다. 14시간여 고된 비행기 여행 탓으로 밤새 잠을 푹 잤다. 시차 적응이 잘 된 것인지, 아니면 유럽 여행이 분비해주는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날아갈 듯 한 기분이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긴 바지에 바람막이 옷까지 챙겨 바르셀로나 근교 몬세라트로 떠난다. 바르셀로나 외곽 호텔에서 묵은 탓에 버스로 30여 분이면 충분하다.
몬세라트는 봉우리가 6만여 개나 된다. 이 가운데 최고봉은 1천236m의 성 헤로니. 이곳 카탈루냐어로 ‘몬’은 산, ‘세라트’는 톱니, 즉 톱니산이다. 거대한 바위산을 톱으로 자른 모습이다. 아주 오래된 옛날, 우리 표현으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바다였다가, 지각변동으로 기암이 모습을 드러낸 카르스트 지형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거대한 바위산을 톱으로 잘라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천사들이 바위산을 잘라내며 흘린 눈물은 산 아래로 흘러들어 강을 이룬다. 산 밑에 그리 넓지 않은 요브레가트강이 유유히 흐른다. 이곳은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어 세계 4대 기독교 성지로 꼽힌다. 검은 성모마리아 상 때문에 카탈루냐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가톨릭의 최고 성지인 만큼 전 세계에서 신도들이 몰려온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예술과 삶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곳으로도 유명하다. 가우디의 대표 건축물이면서 그의 사후 100년을 기념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모델이 된 곳이다.
빗속을 30여 분 버스로 달리는 동안 창밖엔 산맥처럼 바위산이 늘어서 있다.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고 돌아 몬세라트를 오르는 사이 저 멀리 첩첩산에 에워싸인 도시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니, 수도원을 포근히 감싸주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그야말로 암벽 천지다. 케이블카, 푸니쿨라가 가파른 산을 오르내린다. 산 정상을 향해가는 푸니쿨라 궤도는 톱니바퀴 형상이다. 톱니산을 오르는 궤도도 톱니바퀴라니, 참 시적이다.
가파른 산허리 해발 718m 지점에 평지가 있고, 이곳에 레스콜라니아 소년 합창단과 수도원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아찔한 바위산의 중턱이지만 그래서 주변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중장비나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고 인부들이 죽어 나갔을지. 거대하고 고귀한 유물 속에는 숨겨진 잔혹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
평지 첫머리, 산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요셉 마리아 수비락스 조각가의 작품 ‘지성의 계단’이 ‘이제야 왔느냐?’라며 몹시도 반긴다. 아래서부터 식물과 동물, 천사 등으로 9개의 단이 이어져 천국을 향하고 있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고도 한다. 그 밑에 사도들의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사진을 찍어본다. 역시나 상상하기에 따라 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몬세라트는 날씨가 화창해도 안개가 많아 그 아름다움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단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지 비가 오는데도 시야가 좋다. 입을 벌린 채 감탄을 자아내기 바쁘다.
이제 성당으로 갈 시간. 14세기 초 시작돼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년 성가대인 레스콜라니아 소년 합창단 건물을 지난다. 몬세라트 수도원 성가대다. 오스트리아 빈 소년합창단, 프랑스 파리나무십자가 합창단과 함께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힌다. 비는 계속 오고, 바람도 불어와 추위를 느낄 정도다. 한여름 뙤약볕 더위를 의식해 휴대용 선풍기까지 캐리어에 쑤셔 넣고, 반소매에 반바지만 챙기려다, 비행기에선 추울 수도 있을 것 같아, 긴바지와 바람막이 옷을 하나 챙겼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된 고딕양식의 멋진 대성당을 품고 있다. 수도원 건물 앞쪽은 환하게 트여 가느다란 요브레가트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산악열차가 멈추는 몬세라트 랙식 철도역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리라.’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880년 이곳 양치기들이 신기한 빛이 나는 곳을 따라가 작은 동굴에서 나무로 된 검은 성모 마리아상을 발견한다. 1세기 성 유가가 만들고 성 베드로가 몬세라트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당시 약탈자인 이슬람 무어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동굴 안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양치기들이 인근 만레사 주교에게 검은 성모마리아상 발견 사실을 알린다. 주교는 바로 도시로 옮기려 하지만 당최 움직이질 않는다. 주교는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자리인 것 같다.”라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운다. 십자가 순례길 탄생의 시초다. 1025년 작은 수도원이 완성되고,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된다. 1409년 성 베네딕토 독립 수도원으로 위상이 올라간다. 수난도 겪는다. 1812년 정복자 나폴레옹이 두 번이나 불태우고 약탈한다. 급기야 10여 년간 폐쇄되기도 한다. 1880년 몬세라트 1천 주년을 기념하고, 1881년 9월 11일 카탈루냐 국경일에 맞춰 교황 레오 13세가 몬세라트의 성모상을 카탈루냐의 수호신으로 지정한다.
대성당 앞뜰은 산타마리아광장. 몬세라트를 상징하는 문어 장식의 문을 통과해 들어간다. 왼쪽에 수비락스의 작품 성 조르디 조각상이 “어서 오라.”라며 반긴다. 오른손은 방패, 왼손은 칼을 쥐고 있다. 얼굴 부위가 음각 기법으로 조각됐다. 짧은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동안 조르디의 눈동자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는 길을 마치 지켜주기라도 하듯이. 음각 기법이 보여주는 힘이다.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에도 똑같은 조각상이 있다. 오래전에 백성을 괴롭히던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구한 용사의 전설이 전해진다. 그 주인공이 바로 성 조르디. 카탈루냐 수호성인이다.
맞은편 외벽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예수님과 십이 사도가 조각돼 있다. 원래는 은으로 세공된 파사드였지만 1900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다. 멀리 가파르게 올라가는 톱니바퀴 모양의 푸니쿨라 궤도가 여전히 멋져 보인다. 바실리카 대성당 입구엔 예수와 십이 사도 조각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제각기 순교할 때 쓰인 도구를 손에 들고 있다. 성당 앞에는 성경에서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야자수, 영원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영광을 상징하는 월계수가 심겨 있다.
이제 성당 안으로 들어선다. 몬세라트에 온 이유, 검은 성모상을 보기 위해서다. 가톨릭 성인들의 모자이크 벽화를 감상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성모상 앞을 한 소년의 조각상이 지키고 서 있다. 큰 병을 앓았던 이 소년의 소원은 레스콜라니아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 그 사연을 알게 된 수도원이 단 하루 성가대원이 되도록 허락해 그토록 원하던 성가대복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타깝게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년의 부모는 아들의 소원이 영원히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에 레스콜라니아 성가복을 입은 아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수도원에 기증한다.
이윽고 나무로 만들어진 검은 성모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고 검은 피부’를 의미하는 ‘라 모레네타’라 불린다.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상이다. 무릎에 예수를 앉혀 보듬고, 왼손으로 축복을 의미하는 솔방울을 들고 있다. 오른손은 구슬을 들고 있다. 성모상은 유리관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구슬이 있는 부분은 개방돼 있다. 이 구슬을 잡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해 잠시 가족의 안녕과 행복, 즐거운 여행길을 빌어본다. 평소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10여 초 짤막하게 끝내야 한다는데. 신이 함께 한 때문인지, 유독 우리 일행 말고는 뒤에 밀려오는 여행객이 없어 여유를 부릴 수 있어 다행이다.
검은 성모상은 예배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두운 천장 아래 동그란 스테인드글라스의 파란 색상이 아름답다. 긴 의자와 바닥의 타일 장식, 집전 제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저명한 화가의 예술작품이 있는 박물관도 있다. 1929년 카탈루냐의 대표적 건축가인 조셉 푸이그와 카다팔치가 설계했다. 미라와 같은 중동의 고대 작품, 로마와 나폴리의 19세기 작품, 현대 전위 예술, 모더니즘 시대의 다양한 조각품도 볼 수 있다. 스페인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카라바조, 엘 그레코, 알프레드 시슬레 등의 작품도 있다. 성당 안 작은 기도실에는 제단을 장식하는 뼈 하나가 있고, 제단화에 예수의 발과 손의 음각, 빛으로 처리한 예수의 모습이 있다. 참으로 독특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예배당 밖으로 나오면 아베마리아길이 이어진다. 초를 사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이 쓰인 곳에 바치고 기도하는 곳이다.
대성당을 빠져나온다. 안개로 좀처럼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보여주지 않는다더니, 여지없이 안개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면 그렇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아름다운 전망은 없겠구나.” 아쉬울 뿐이다. 여기서 푸니쿨라를 타면 성 호안(성 요한) 방향으로 오를 수 있다. 경사도가 65%나 되는 스페인에서 가장 가파른 푸니쿨라다. 내려가는 푸니쿨라를 타면 산타 코바로 내려간다. 일명 십자가의 길이 있다. ‘푸니쿨리푸니쿨라, 푸니쿨리푸니쿨라~’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발길은 케이블카로 향한다.
수도원에서 케이블카까지는 계단으로 5분 거리. 비 때문에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일행 한 명이 결국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다. 팔꿈치에 붉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가는 길이 더더욱 조심스럽다. 땅만 보고 걷다가 주변이 훤해진 게 느껴진다. 어느새 먹구름이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안개도 걷혔다. 행운의 여신이 함께한 것일까? 올라갈 때는 버스로 꼬불꼬불 도로를 달렸지만, 내려올 때는 케이블카로 시원하게 하강한다. 위로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기암괴석, 아래로는 유유히 흐르는 요브레가트강물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좋다.
다음 여행지로 가는 동안 몬세라트의 아름다운 기암 경치를 뇌리에 되새기며 바르셀로나의 역사 문화를 떠올린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에스파냐어와는 억양이 다른 ‘카탈루냐어’를 쓰고 자부심 또한 강하다. 수도 마드리드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도시다. 우리네 영호남 갈등보다도 심하다. 오죽하면 분리독립을 추진하기까지 할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더더욱 잘 아는 대결 양상이다.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관계. 우리네 축구 한일전처럼 서로에게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다. 심지어 월드컵 경기에서 스페인이 나오면 카탈루냐 사람들은 상대 팀을 응원할 정도다. 스페인 내전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은 중립을 지키며 양쪽 세력과의 거래로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 독일의 대서양 통제로 스페인에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물가가 상승하고, 노동자와 공무원의 불만이 폭주해 파업으로 이어졌으나 군대 개입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사회적 혼란과 긴장감이 지속되고 수습이 불가해지자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잠시 차지한다. 1931년 선거에서 군주제 대신 제2공화정이 선포된다. 공화정의 정책에 보수파가 불만을 드러내는 등 내부 혼란이 이어지다 1936년 결국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반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 내전이지만 독일, 이탈리아, 소련 등이 개입하고 전 세계에서 공화주의를 지키려는 의용군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확전한다. 1936년 7월 프랑코 장군의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진영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좌파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스페인은 프랑코파와 공화파로 갈라지고, 주변 국가들까지 가세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참변이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파시즘 정권이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15만 대군을 보내 프랑코를 전폭 지원한다. 확전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 원칙을 고수한다. 이들은 공화파를 지원하지만, 거리상의 이유로 한계가 있다. 대신 전 세계의 좌파 지식인,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이 의용군 ‘국제여단’을 결성해 공화파 시민군과 연대해 싸운다.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등 세계적 지성과 문호도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한다. 1937년 4월 독일 공군은 공화파를 지지하는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융단폭격해 1천600여 명의 민간인이 숨진다. 신무기를 시험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게르니카를 초토화한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탄생한 이유다.
말보다 그림을 먼저 배웠다는 피카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해안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고 화가로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주로 활약했다. 자서전에 “나는 안달루시아의 작은 물잔에서 태어났다”라고 남길 정도로 말라가 출신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단다. 그는 파시스트들이 집권한 조국에 이 걸작이 반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게르니카’는 스페인이 민주화된 후인 1981년에야 스페인에서 전시하게 된다.
내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7년 4월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히틀러가 저지른 융단폭격. 프랑코를 돕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최신 비행기 성능을 시험한 것으로 공중전의 시초다. 게르니카는 이틀 내내 불탔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했다. 당시 56세였던 피카소는 분노에 차 그림을 그린다.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서 처음 공개된 ‘게르니카’.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처참한 모습이다. 이미 죽어서 힘없이 축 늘어진 아이를 품에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창에 찔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말, 불타는 건물, 폭탄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하늘을 보며 두 팔을 들고 절규하는 사람, 한 손에 부러진 칼을 든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피어난 꽃, 그리스·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처럼 전쟁의 잔인함을 암시하는 황소…. 피카소는 준비 과정으로 스케치 45점을 그렸고, 그중 상당수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 사진 역시 같이 전시돼 있다.
내전은 1939년 3월 프랑코 군이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면서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쟁으로 모두 60만 명이 희생됐다. 프랑코 정권은 무수히 많은 공화파를 처형하고 장기 독재를 이어간다. 파랑코의 독재가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카스티야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자치국 깃발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카탈루냐 지방은 지독한 탄압과 불평등을 겪는다. 당시 정치와 행정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된 카스티야와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던 카탈루냐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이유다. 고유의 지역적 특색을 지닌 채 살아온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 지역감정을 부추긴 셈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축구 라이벌이다. 프랑코 정권의 총애를 받은 레알마드리드팀과는 다르게 반골 지역 취급을 받으며 프랑코의 탄압을 받은 카탈루냐의 FC바르셀로나(Futbol Club de Barcelona)는 카스티야어 표기법인 ‘CF 바르셀로나(Club de Futbol Barcelona)’로 바뀌고, 로고에 있던 카탈루냐 지역 모양도 삭제당한다. 축구장 안에서만큼은 카탈루냐어가 허용돼 카탈루냐 사람들의 유일한 울분과 서러움을 표출할 수 있었다. 우리도 과거 1980~90년대 무등경기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그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그때만큼의 정서는 아닌 듯하다.
1975년 프랑코 총통이 죽자, 그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다. 새로운 헌법으로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한다. 지역 자치를 인정하면서 스페인의 공식 언어는 네 개로 나뉜다.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스페인어인 카스티야어.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는 라틴어에서 나온 언어지만, 바스크어는 이와 전혀 비슷하지 않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다. 지역 자치가 강화되면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원하고 있다. 카탈루냐에 가면 스페인 국기 대신 카탈루냐 깃발이 펄럭인다. 카탈루냐 자치구 깃발은 노란색 바탕에 4개의 붉은색 줄이 그어져 있다. 아라곤 왕궁의 문장이다. 카탈루냐의 마지막 왕이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입었던 옷이 노란색이었고,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옷에 줄을 그었던 것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새 바르셀로나 시내로 들어간다.
바르셀로나는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와 함께 연간 1천3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 3대 관광지다. 안토니오 가우디, 한 인물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일명 ‘가우디의 도시’로 통한다. 서울보다 6배 작은 도시지만, 스페인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제1의 항구도시다. 프랑스와 피레네산맥을 사이에 둔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다. 몬주익의 언덕이 이곳에 있다. ‘몬’은 산, ‘주익’은 유대인을 뜻한다. 유대인의 산이란 뜻으로 14세기 스페인이 통일될 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이 스페인 전역에서 몰려와 살던 곳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는 이 가파른 몬주익 언덕을 지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바르셀로나와 경기도의 교류 흔적으로 황영조 동상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도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신시가지는 정육면체 바둑판같은 도시다. 1800년대 도시가 발전하면서 구시가지 성벽 안쪽에서 전염병 등이 창궐하자 성벽을 허물어 도시를 확장한 데서 비롯됐다. 시내 어느 골목이든 중세풍의 건물이 즐비해 마치 거대한 박물관을 거니는 듯하다.
바르셀로나의 웅장함의 역사이자, 지역의 자부심인 속죄의 성가족성당(라 사그라다 파밀리아)으로 향한다. 요셉과 마리아, 예수의 가족성당이란 뜻이다. 예수만큼이나 인간적이었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과 함께 예술로 바르셀로나를 빛낸 인물이다. 1852년 대장장이 출신 구리 세공인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5세부터 관절염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당시 지중해 햇살 속에 동식물 등 자연과 벗 삼아 살던 것이 후에 천재성을 과시하는 밑천이 된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시립 건축 전문학교 시절.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라는 평가 속에 학업을 마친다. 1878년 파리국제만국박람회의 스페인 전시관에서 철제 가로등을 전시해 평생의 후원자를 얻는다. 부유한 은행 가문 출신의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만난 것.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구엘의 도움으로 명작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놓은 듯한 6층짜리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한 창문으로 유명한 카사 바트요, 후원자 구엘을 기념하기 위한 구엘 공원 등….
가우디가 성가족성당의 설계를 맡은 건 1883년 11월. 이후 그는 40년 넘게 성당 건축에 참여하고, 생의 마지막 15년 동안은 종교적 사명감에서 오롯이 성당 건축에만 매달린다. 지하실과 1층 건물, 좌우 벽면을 만들고, 출입구와 탑의 낮은 부분 쪽으로 작업을 확대한다. 이어 탑 윗부분 작업을 시작해, 아래의 4각형 형태가 위로 가면서 둥글게 변하는 특이한 구조로 만든다. 긴 원뿔 형태의 이 환상적 첨탑 중 동쪽의 것들은 가우디 사후인 지금에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가 1926년 숨지기 전까지 43년 동안 모든 정열을 쏟아부은 생애 최대 역작, 성가족성당. 몬세라트의 가파르게 치솟은 기암절벽에서 영감을 얻었다더니, 옥수수를 닮은 듯 하늘 높이 치솟은 수많은 종탑이 시선을 압도한다. 마치 동화 속 우스꽝스러운 궁전 같기도 하다. 종탑은 동서남북 외벽마다 4개씩 모두 12개로, 십이 사도를 상징한다. 종탑마다 구멍을 내 종소리가 머나먼 곳까지 울려 퍼지도록 했다. 성당은 가장 높은 172.5m 예수님 첨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십자가 모양이다. 유럽 성당의 전형이다. 첨탑을 중심으로 동쪽 면은 '예수의 탄생', 남쪽 면은 '예수의 영광', 서쪽 면은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가운데 가우디의 작품은 동편 외벽이다.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꼭대기에는 크레인이 볼품없이 움직인다. 2026년 가우디 사망 100주년 완공이 목표다. 144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되는 셈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위대한 건축물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은 셈이다.
성당에 들어가려면 금속 탐지기를 거쳐야 한다. 식음료 반입도 안 된다. 남자는 모자도 쓸 수 없다. 비는 촉촉이 내리고, 바람마저 거세 추운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에 바쁘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왠지 경건해야 한다는 마음에 옷매무새를 만져본다. ‘신자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 건지.’ 속으로만 피식 웃는다.
특이하게도 성당 안 기둥이 기울어져 있다. 기다란 줄에 추를 달아 포물선이 그려지면 이를 뒤집어 만드는 '현수선' 기법이다. 직선 기둥보다 오히려 하중을 잘 견딜 수 있다. 가우디만의 독특한 형태다. 아니, 로마 판테온의 돔에서 배운 창조적 모방 기법이다. 둘레의 모든 곳에 밀치는 힘(추력)을 가해 육중한 건축물을 지탱하는 돔 양식에서 착안한 것이다. 성당 내부는 온통 가우디 작품의 전시장이다. 엄청난 규모의 성당인지라 모두 52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기둥은 마치 종려나무 같다. 위로 올라가면서 가늘어지고, 중간에 매듭이 있다. 기둥 윗부분은 가지를 친 것처럼 둘, 셋으로 갈라진다. 기둥은 45m 천장까지 이어진다. 천장의 가장자리 부분은 높이가 30m나 된다. 역학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작업이다. 건물의 내외관에 곡선을 적용하는 가우디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 일군 역사다.
성당 안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양식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명작이다. 환하고 내부 조각도 현대적이다. 천장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빛과 성물 일부의 인공조명이 잘 어울린다. 스테인드글라스도 화려하고 멋지다. 이같은 빛의 조화 때문인지 평안함이 느껴진다. 성당에서 가장 높은 예수님 첨탑은 높이가 무려 172.5m. 몬주익의 언덕(해발 173m)보다 낮게 설계했다. 자연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은 가우디는 하느님이 만든 자연보다 높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성당 안 북쪽 제단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줄에 매달려 있다. 그 위로는 하늘에서의 영광을 상징하듯 양산 같은 것이 걸려 있다. 파격적이고 현대적이랄까? 예수상 뒤로는 두 개의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천장은 기하학적으로 잘 어울린다. 바닥에는 JMJ라는 캘리그라피를 볼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 예수의 이니셜이다. 성가족이라는 성당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벽에서도 세 가족의 모습을 표현한 동판을 볼 수 있다.
성당 서쪽 벽면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새겨진 조각상이 눈에 띈다. 하느님의 성령으로 태어나 동방박사의 축복을 받고 자란 예수가 고난을 당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수비락스의 작품이다. 가우디가 만든 동쪽 면과는 달리 선이 뚜렷해 기계적이라는 느낌이다. 예배당 남서쪽으로는 탑으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공사 중이라 가볼 수 없다. 성당의 남쪽 벽면은 영광의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 아직 공사 중이다. 남쪽 출입구는 제단에 이르는 정문으로, 천국을 상징하는 선과 지옥을 상징하는 악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최후의 심판과 영광이 조각의 중심을 이룰 예정이다. 장차 정문이 될 터이지만 우리에겐 출구가 되는 남쪽의 장막에는 2010년 11월 7일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성당을 축성했다는 글과 환영한다는 각국어가 쓰여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한글이 선명하게 쓰여 있어 자부심이 느껴진다. 성가족성당을 배경으로 신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교황의 모습이 그래픽으로 표현돼 있다. 성당 남쪽 면의 완성 후 모습이 기대된다.
남측 외벽 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출입문이 있는 아랫부분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의 상황. 문 앞 기둥에는 예수가 밧줄에 묶여있는 듯한 장면으로 채찍질 당하는 모습. 그 기둥 위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알파와 오메가(ΑΩ)가 쓰여 있다. 그 기둥 왼쪽으로는 ‘유다의 키스’ 조각물이 보인다. 출입문 바로 위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예수를 따르는 마리아도 보인다. 그 위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머리를 숙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상을, 아니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온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들 조각 위로는 네 개의 첨탑이 솟아 있다. 첨탑 아랫부분에는 네 사도상과 이름이 조각돼 있다. 야코부스, 바르톨로무스, 토마스, 필리푸스. 네 사도 위로는 창이 나 있고, 그 위에 ‘거룩하시다’라는 뜻의 상투스가 적혀 있다. 네 개 탑의 한가운데에 승천하는 예수가 앉아 있다. 성당 남쪽 전면에 표현될 영광의 신비로 옮겨가기 위한 모습이란다.
성당 남쪽 지하박물관은 성가족성당 작업의 지휘부다. 가우디가 만든 건축 설계도와 모형을 볼 수 있다. 내부는 제단과 신자의 공간으로 나뉜다. 제단은 예수가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 호위하고 있다. 그 밖을 바르톨로무스, 토마스, 유다, 시몬 등 나머지 8 제자가 감싸고 있다. ‘저 높은 곳에 하느님의 영광’, ‘주 찬양’ 등의 문구도 적혀 있다.
아차차, 박물관에서 나와 생각해 보니 뭔가 놓친 게 있다. 가우디의 무덤. 분명 성당 안에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저기 사진 찍기에 바빠 들르지 못했다. 다시 발길을 되돌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묘지를 찾는다. 가우디는 성당 지하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 성당 안 가우디의 무덤과 그 위에 놓인 동판을 볼 수 있다. 가우디 무덤이 있는 예배당에는 경건한 예배를 올리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 예배당 지하 가우디의 무덤과 그 위에 놓인 동판을 멀찍이서 내려다본다. 오늘 여행의 기쁨을 안겨준 가우디에게 존경을 표하며….
안토니오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성가족성당 작업을 하다 초췌한 몰골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전차에 치인다. 당시 성당 건축에 몰입하면서 얼굴엔 피로가 쌓여 있고, 채식주의자인 데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보니 마치 거리의 부랑아처럼 삐쩍 마르고 행색이 남루했다. 사람들이 가우디를 알아보지 못한다. 급기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치료를 거부당한다. 결국 극빈자 구호병원으로 쫓긴다. 다음날 친구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그를 찾을 때까지 사람들은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를 알아보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나은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가우디는 그 제의를 거절한다. “극빈자 차림이라고 치료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치료받고 싶지 않네. 나는 여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겠네.”라며. 사흘 후 그렇게 천재 건축가는 위대한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는 반국장으로 치러지고, 그가 평생을 공들였던 성가족성당 지하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는다.
가우디의 서글픈 최후를 뒤로 하고, 그가 남긴 또 하나의 걸작인 구엘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구엘 백작은 쿠바에서 노예장사와, 석유·섬유사업으로 돈을 모은 대부호다.
구엘공원은 영국 상류층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대규모 주택단지로 설계한 것이다.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던 계획. 그러나 그 위치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돌이 많고 가파른 산기슭에 위치해 당시 이동 수단이었던 말이나 증기기관차로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었고, 결정적으로 물도 없는 곳이었다. 작업하는 데 애를 먹고, 자금난마저 겹쳐 14년간 단지 몇 개의 건물과 커다란 광장, 예술작품 같은 벤치 정도만 남긴 채 애초의 화려했던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만다. 분양이 이뤄진 건물은 단 세 채. 구엘과 가우디, 구엘의 변호사 저택뿐이다. 구엘 사후 1922년 바르셀로나시가 이 땅을 사들여 공원으로 일반에 공개하면서 가우디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행이다. 그들의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공원은 일부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돼 감히 와보지 못했을 텐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계획된 인공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공원이 자태를 뽐낸다. 도로를 만들고 산을 개간하면서 나온 모든 돌을 버리지 않고, 건축에 그대로 활용한다. 대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색과 포물선 형태의 아치를 비롯한 곡선의 아름다움, 화려하고 신비한 모자이크 장식의 타일 등 천재 가우디의 정열이 느껴진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2층 구조의 도로. 다리를 받친 기둥은 자잘한 돌을 조립해 만들었다. 계획해서 모양을 만들어 낸 재료가 아니라 그냥 있는 돌로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가우디의 천재적 건축기법의 비결이다. 야자수랑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한 것도 돋보인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다, 마치 자연 그대로를 보는 느낌이다. “이래서 가우디~ 가우디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기둥을 중심으로 아래는 사람이 다니는 도로, 위로는 마차가 다니는 도로다. 인도는 마차도로 아래 있어 그늘이 지고, 군데군데 왕처럼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돌의자가 있어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마찻길로 올라가 본다. 알로에 돌화분 너머로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는 푸른 동산이 하얀 구름과 경계를 이루고 동산 양 끝으로는 지중해가 구름과 맞닿아 있다. 사진 명소가 따로 없다.
도로를 내려와 둘레길로 들어서니 가우디의 핑크빛 저택이 내려다보인다. 현재는 가우디 하우스 뮤지엄이다. 저택을 내려다보며 가는 둘레길 가장자리엔 커다란 구 모양의 돌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쉬어가는 용도인가? 일행들이 돌마다 3~4명씩 앉거나 서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광장에서도 멀리 내려다보이는 경관은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하얀 구름과 지중해 파란 수평선이 맞닿아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이어진 듯하다. 그 앞으로는 바르셀로나 시내가 펼쳐진다. 시선을 발밑으로 돌리면 야자수 같은 나무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타일 벤치가 이색적이다. 하나하나 타일을 붙여 만든 것이다. 트렌카디스 기법이란다. 돌의자여서 앉으면 왠지 불편할 것 같은데,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졌다. 허리를 받쳐주고 등받이가 있으며 목까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놓아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그 빗물은 공원을 받치는 기둥으로 흘러 들어가 서로 모이게 돼 있다.
밑으로 내려가니 비스듬한 바위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파도 동굴이 나온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절대 무너지지 않는, 돌과 흙으로 만든 터널이다. 비스듬한 기둥이 건축학적으로는 오히려 더 견고하단다. 곡선은 신의 선이라고 생각했던 가우디가 신을 모방한 것이다. 한 무리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만의 사진을 찍고 싶어 애타게 기다려보지만 좀처럼 이동할 기미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배경 삼아 셔터를 누르고 그 아래로 더 내려간다.
그리스·로마 신전에서나 볼 법한 도리아식 거대한 돌기둥이 줄지어 있다. 조금 전 타일 벤치에서 쉬었던 광장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86개나 된다. 구엘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좋아해 그리스 신전처럼 꾸몄다고 한다. 천장은 깨진 타일 조각과 버려진 술병 등을 재활용해 해와 달, 구름을 형상화해 장식했다. 산을 개간해 나온 돌을 모두 재활용한 것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어느 것 하나도 하찮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둥 사이사이의 공간은 시장으로 활용하려 했단다. 기둥은 가운데가 뚫려 광장으로부터 흘러내린 빗물을 받아 다시 밑으로 내려보내고, 그 바닥 아래 저장한다. 배수로 역할과 저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로마 시대 빗물 활용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다. 모은 빗물은 생활용수로, 식물을 기르는 용도로, 분수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개발 전까지만 해도 민둥산이었던 이곳 공원에 나무숲이 우거지게 된 비결이다. 기둥 건축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법이 숨어있다. 바로 앞 첫 기둥부터 저 멀리 마지막 기둥까지의 가운데 구분 선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보인다. 원근법을 무시해 기둥마다 구분 선 높낮이를 다르게 한 결과다. 높이도 평균 키인 사람의 눈높이에 맞췄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구분 선이 멀리 보이는 지중해의 수평선과도 일치한다는 것. 보면 볼수록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광장을 내려가는 계단에는 광장 기둥에서 걸러진 물로 솟아오르는 3단 분수가 있다. 구엘공원의 마스코트인 도마뱀 분수다. 아니 도마뱀을 닮은 용의 분수다. 알록달록한 타일로 꾸며져 동화적이라는 느낌이다. 정문으로 향하니 과자집 같은 건물이 있다. 관리실로 설계됐는데, 지금은 기념품 가게다. 끝은 뾰족하고 아래는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의 지붕, 갈색과 흰색의 돌담 같은 벽체, 누가 봐도 상상 속 동화의 나라에 나올 법한 건물이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의 집처럼.
동화 속 풍경 감상을 끝으로 구엘공원과 이별을 고한다. 이제 바르셀로나 시내 구경에 나설 차례다. 바르셀로나 시내는 카탈루냐 광장을 중심으로 남쪽의 구시가지와 북쪽의 신시가지로 나뉘고 서쪽에는 몬주익 언덕이 있다. 구시가지에는 람블라스 거리가 있다. 미로가 디자인한 모자이크 바닥으로 유명한 최고의 번화가다.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이 있는 라발 지구, 중세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딕 지구, 지중해가 펼쳐지는 해안가의 바르셀로네타 해변 지구가 있다.
바르셀로나 최고의 번화가를 걸어본다.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 카탈루냐 광장, 람블라스 거리, 라파우광장의 콜럼버스 기념탑, 벨 항구까지 도심을 관통한다.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와 그라시아 지구를 연결해 주고, 가장 부유한 계층이 사는 공간에 자리 잡은 카사 밀라.
가우디가 성가족성당 건축에 몰입하기 전에 혼신을 다한 작품이다. 페레 밀라의 의뢰로, 1906년 설계해 1910년 완공한다. 가우디의 가장 시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건물 외부가 커다란 바위산에서 마치 돌을 캐내는 채석장을 닮았다고 해‘라 페드레라(채석장)’라고도 불린다.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둥으로만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했다.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파도치듯 부드러운 곡선 모양으로 이뤄진 외벽이 환상적이다. 옥상의 굴뚝은 마치 투구를 쓴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영화 ‘스타워즈’를 연상케 한다. 엘리베이터를 건물에 넣은 초기 바르셀로나 건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지붕 아래 공간을,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다락으로 만든 최초의 바르셀로나 건물이다. 지하 주차장에 처음으로 마차 주차장도 만들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많이도 따라다닌다.
좀 더 걸으면 카사 바트요가 눈길을 끈다. 역시 가우디 명소다. 반듯하고 널찍한 그라시아 산책로에 위치해 눈길을 확 끄는 매력을 뿜어낸다. 구불구불하고 알록달록한 건물 외관이 멋지다. 원래 1870년대에 지어진 밋밋한 건물이었는데, 조세프 바트요 부부가 1900년 이 건물을 구입해 가우디에게 재건축을 맡긴다. 1904년부터 작업을 시작, 위에서부터 아래로 리모델링을 해 결국 꼭대기에 한 층을 추가하고, 지하실도 만든다. 모든 공간에서 직선을 없애고 곡선으로 새단장한다. 특히 카탈루냐 수호성인인 조르디의 전설을 재현한다. 조르디는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해준다. 말을 타고 창을 든 조르디가 용을 공격할 때 나온 피가 장미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카탈루냐에는 성 조르디를 기리는 축일인 4월 23일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카사 바트요의 지붕은 용의 등이다. 등뼈와 비늘이 보인다. 굴뚝은 조르디가 용을 찌른 창이다.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작은 발코니의 쇠창살은 용이 먹어 치운 먹이(동물 또는 사람)의 해골이다. 시내 한 가운데 으스스한 해골이라니,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 할 문화다. 물결치는 듯 구불거리는 외벽은 용이 살던 연못의 물 표면이다. 채광과 통풍에도 정성을 들였다. 1층과 2층의 외벽은 창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외부 창은 물론, 파티오(위쪽이 트인 건물 내의 뜰) 쪽으로 난 창이나 복도에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 최대한 통풍이 잘되도록 했다.
좀 더 걸어가면 카탈루냐광장이 나온다. 최대 번화가인 람블라스 거리의 시작점이다. 광장에는 역계단 모양의 인상적인 조각품이 있다. 프란체스크 마시아 기념비다. 프란체스크 마시아는 카탈루냐 초대 대통령으로 헌정된 인물이다. 계단이 끝나지 않은 느낌이다. 카탈루냐 지역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단다.
람블라스 거리로 들어가 미로의 모자이크 바닥을 밟아본다. 더운 날씨에 기나긴 시내를 걷다 보니 힘에 부친다. 잠시 츄러스집을 찾아 달달한 초콜릿 소스에 찍어 먹고, 시원하게 맥주도 들이켜며 목을 축인다. 다시 람블라스 거리 끝까지 가, 포트벨 항구에 다다른다. 항구 입구에 동상 하나가 60미터 높이로 치솟아 있다. 콜럼버스 기념탑이다. 돌과 철, 청동으로 만들었다.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기념해 1888년 만국박람회 때 지은 것. 콜럼버스가 아메리카가 있는 서쪽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서 있다.
포트벨 항구에서 파에야와 홍합으로 저녁을 때운다. 야외식당에서 해변을 마주 보며 맥주를 마시니 기분이 좋다. 상한 듯한 홍합만 아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을. 어쨌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그 홍합 때문에 앞으로는 모든 식사를 정해진 식당으로 가지 않고 자유식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오히려 여행의 여유를 찾게 돼 전화위복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아쉬운 대로 짧은 바르셀로나 여정은 이렇게 마무리되는가 했는데…. 여행엔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 그라나다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간 바르셀로나 공항. 탑승 수속이 왠지 불안하다. 티켓팅 키오스크가 잘 작동하질 않는다. 어쩐지 줄 선 사람이 없아 한산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 결국 긴 줄이 늘어선 창구로 발길을 옮긴다. 스페인 사람들 참 일머리 없다더니, 결국 여기서 일이 터지고 만다. 일행 중 한 명의 탑승권에 다른 일행의 이름이 적힌 것. 한 이름으로 두 개의 탑승권이 나온 것이다. 무심코 탑승권만 받아 들고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비행기를 타는 순간에 낭패를 볼 뻔했다. 곧바로 시정을 요구했지만, 해당 창구 젊은 여직원은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바로 옆 창구 중년의 여직원과 실랑이 끝에 겨우 재발급을 받았다. 하지만 더 큰 일은 그라나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 한 명의 캐리어가 사라진 것. 발을 동동 구르며 직원들에게 손짓발짓 하지만 직원들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자신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듯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양새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좀처럼 해결될 성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든 일행의 여행을 망칠 순 없어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두 근심인 채로. 버스 안에서 인터넷을 뒤지고, 현장 가이드의 경험에서 나온 대처도 해보고, 여행사 사장님이 다양한 네트워크도 동원해 보지만, 쉬 풀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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