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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의 해외여행

샛강의 스페인 여행. 코르도바 메스키타, 콘수에그라 돈키호테 풍차,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 톨레도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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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30.

 

 

스페인 여행기 5

 

아침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가는 길, 엘리베이터를 잘 못 골라 탔다. 그 덕에 호텔 지하 1층에서 유리막으로 둘러싸여 보존된 로마 유적지를 둘러본다. 스페인은 유물이 나온다고 해서 개발을 멈추지 않고, 새롭게 어우러질 방법을 찾는단다. 그렇다고 훼손하는 일은 없다. 결국 유물은 현시대 사람들 일상의 일부가 되고, 그것이 또한 역사적 자산이 되고 있다. 모든 개발을 멈추고, 그 일대를 유적으로 보존하는 우리네 사고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로마 시대 유적이 곳곳에 하도 많아서 가능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아침을 먹자마자 메스키타로 달려간다. 평일 개관 시간은 오전 10. 근데 재밌게도 그 전에 입장하면 무료다. 무료로 호사를 누리기 위함이다.

 

메스키타는 로마, 고딕, 시리아, 페르시아 등 온갖 건축양식의 총산이다. 모스크의 스페인어, 즉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교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아랍어 모스크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곳이란 뜻이다. 8세기 후반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바그다드에 버금가는 도시를 코르도바에 세우고자 당시 서고트족 교회의 일부를 사들인 뒤 이슬람 사원을 건축한다. 9~10세기 크게 세 번이나 증축하면서 약 25천 명의 신자가 동시에 예배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다. 스페인의 유일한 이슬람 사원이자, 세계 3대 이슬람 사원이다. 하지만 13세기 페르난도 3세가 대성당을 개조한다. 이슬람 사원 기도실은 원형대로 사용하되 중앙에 르네상스 양식의 돔 천장과 왕실 예배당, 제단을 건축함으로써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을 넘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두 종교의 융합 건축물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 예배당이 너무나도 광대해 질린다 싶으면 아랍의 화려한 문양이 반기고, 지루할 만하면 다시 가톨릭 문명이 튀어나온다.

성당에 들어서면 붉은색 돌(홍예석)과 흰색 돌(사암)을 번갈아 쓴 단순한 줄무늬 아치 기둥들이 인상적이다. 화강암, 벽옥, 대리석으로 된 850여 개의 원주 기둥이 로마식 말발굽 모양의 아치를 떠받치는 형상이다. 메스키타를 지을 때 그리스 양식의 건물에서 잘라 온 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어서 이중 아치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둥과 기둥머리를 보면 이오니아, 도리아, 코린트 등 다양한 그리스 양식이 섞여 있고, 기둥 석재도 대리석, 화강암, 마노 등으로 다양하다.

성당 중앙 제단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고개를 들면 저 높은 곳에 자연채광을 위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햇볕이 들어온다.

 

 

미흐랍이란 기도실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기도하는 듯한 부조가 있다. 이슬람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드리는 방향이 표시된 곳이다. 무슬림이 올바른 방향으로 예배를 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모스크의 중심 공간이다. 널찍한 7각형의 미흐랍은 전형적 무데하르 양식의 열쇠 구멍 모양이다. 벽은 대리석과 황금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하면서도 미흐랍을 원형으로 보존해 모스크의 핵심 공간인 미흐랍과 대성당의 핵심 공간인 주제단을 하나의 지붕 아래서 볼 수 있다. 천장 문양도 독특하다.

 

국토회복운동 후 승리를 상징하는 가톨릭 성당이 사원 중앙에 들어섰다. 사원 내부의 벽면에는 가톨릭 예배 공간이 있다. 수반이 있던 중정에는 오렌지 나무를 심고, 중정을 둘러싸고 있던 아치도 모두 벽으로 막아버렸다. 원래 말굽 모양의 아치 기둥은 1천 개가 넘었는데 성당을 세우면서 약 150여 개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면서 거대한 성당 안을 도느라, 기진맥진해 밖으로 나온다.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첨탑 미나레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지 저기 멀리서 훤칠한 신부님이 성당 쪽으로 걸어온다. 여성 일행들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몰려들고, 신부님은 기꺼이 사진 찍기를 허락하신다. 피곤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모두 화사하게 웃음꽃을 피운다.

 

이제 메스키타를 벗어나니, 피곤해서 로마다리를 건널 힘이 없다. 택시를 타고 로마다리를 지나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로마다리 건너편 요새인 칼라오라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멀리 메스키타의 미나레트 첨탑에선 가지 말라고 붙잡는 듯 우렁차게 종소리를 울려 퍼뜨린다. 

 

종소리 여운을 뒤로 하고,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다음 여정인 콘수에그라까지 시간여를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차창 밖은 달려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 넓게 펼쳐진 평원과 파란 하늘의 구름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군데군데 말떼가 풀을 뜯고,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올리브밭이 우거졌다. 간간이 민둥산에 풍력발전기도 눈에 들어온다

띄엄띄엄 한적한 시골 마을이 나오고 동산에 우뚝 선 성당의 모습은 고즈넉하다. 밭 한 가운데 있는 시골집들은 항상 바로 옆에 나무가 한두 그루 함께 서 있다. 따가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포도밭도 늘어서 있다. 키 작은 포도와 키 큰 포도. 키 작은 포도는 흙바닥에 닿아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와인용으로 쓰이고, 키 큰 포도는 따 먹는 용도란다. 때로는 아몬드밭도 있다. 꽃이 눈송이처럼 생겨 눈이 오지 않는 사막에서 온 이슬람인들이 좋아했단다. 황량한 사막에서 온 이슬람인에게는 그야말로 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장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스페인 중부 메세타 고원에 위치한 톨레도주의 카스티야 라만차 자치 지방 도시 콘수에그라. ‘미쳐 살다 정신 들어 죽은' 돈키호테의 배경 도시다. 라만차 평원의 바람을 가르는 풍차가 줄지어 서 있다. 정의의 사도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해 싸운 풍차다. 소설에는 30~40여 개의 풍차라고 묘사돼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어디서 모험을 하고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언덕 같은 민둥산에서 풍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 언덕 아랫마을은 민둥산에서 부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많아 집집마다 대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있다.

콘수에그라 언덕에는 12개의 하얀 풍차가 그림같이 늘어서 있다.

 

 

 

 

 

 

 

 

 

 

 

 

 

 

울퉁불퉁한 암석, 까만 날개의 거대한 풍차,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아름다운 콘수에그라 언덕이 보여주는 풍경이다.

 

 

 

 

 

 

 

 

 

 

 

 

 

 

세찬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마을 쪽으로 눈을 돌리면 지평선과 맞닿은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함을 더한다.

 

풍차는 네 개의 날개가 달린 하얀 원기둥 몸통에 검은색 원뿔 모자를 쓴 모양새다. 과연 돈키호테가 그 모습을 보고 거인이라고 착각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스페인에서는 풍차를 몰리노라 부른다. 원래 밀을 빻던 방앗간이다.

 

루치오라는 이름의 풍차가 있다. 입구에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창과 방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매점으로 운영되는 풍차 내부로 들어간다. 위로 올라가면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풍차의 내부 공간을 엿볼 수 있다. 방아를 찧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날개가 돌아가는 풍차를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를 떠올려 보며 다시 다음 여행지로 발길을 돌린다.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낸 이사벨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자들을 모조리 쫓아낸다. 그중에서도 우수한 능력을 갖춘 유대인을 추방하는 실정을 저지른다. 기나긴 유대인 핍박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의사와 재정 관리자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이베리아반도의 경제권을 장악한 유대인은 스페인의 두뇌집단이었던 셈이다. 이들의 이탈로 재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톨릭 국가로서, 다양성을 아우르지 못한 스페인은 보수적 차별 정책으로 국가 성장에 기여할 인재를 스스로 놓친 셈이다. 하지만 이사벨에게는 신의 한 수가 있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는 탐험을 위한 후원을 받기 위해 유럽 왕실을 떠돌았지만 거절만 당하다 이사벨의 지원을 받는다. 이사벨은 영토 확장과 가톨릭 전파를 위해 후원하고, 결국 이 선택은 막대한 금과 자원이 돼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200년간 스페인 황금시대가 열리고 식민지 개척이 시작된 것이다.

 

이사벨의 둘째 딸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 펠리페 대공과 결혼하고 카를로스를 낳는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피가 섞인 카를로스는 1516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다. 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 신성로마제국에선 카를로스 5세로 불린다. 그 외에도 스페인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탈이리아 왕, 독일 왕, 데덜란드 영주, 오스트리아 대공 등 20여 직함을 얻는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럽 최대 왕실 가문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15세기 중반부터 약 3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족으로 군림한다.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여러 왕실과의 결혼 작전으로, 자연스레 유럽 여러 국가 왕실과 사돈의 팔촌으로 엮인다. 이런 배경에서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할아버지로부터 합스부르크 왕조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고,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서도 여러 해외 땅을 상속받아 열아홉의 나이로 세계 거대 제국의 주인이 된다. 지배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를 뺀 서유럽 일대를 비롯해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와 아시아의 필리핀까지다. 16세기 스페인에서 세계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해 아들과 동생에게 각각 상속해 준다. 스페인과 식민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하지만 펠리페 2세는 영토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빚까지 물려받는다. 유대인 추방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경제 상황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것이다. 1556년 등극하고 보니, 국고 수입은 죄다 저당 잡혀 있다. 결국 등극 다음 해인 1557년 최초로 파산선언을 한다. 하지만 팽창정책은 계속되고, 멈출 줄 모르는 전쟁은 경제 상황을 계속 악화시켜 1560년 또다시 파산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막대한 군사비로 재정은 계속 쪼들린다. 낌새를 눈치챈 채권자들에 의해 상승한 이자가 40%에 육박하자 1575년 또다시 파산선언을 한다. 이 와중에 1580년 알칸타라 전투에서 승리한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 제국에 합친다. 이로써 세계 최대 무적함대를 소유하게 되고, 포르투갈의 여러 식민지까지 속국으로 만든다. 결국 스페인은 무려 4개 대륙에 걸친 지구상의 최대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이룬다. 스페인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1588년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파병한다. 하지만 영국함대는 새로운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데다, 폭풍우까지 불어닥치면서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히 패한다. 1588년 칼레해전. 이로써 대영제국은 새롭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등극한다. 이미 30년 전부터 경제 기반이 무너져 온 스페인은 군사력에서도 위험 징조를 보이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막스 베버의 추계에 따르면 전쟁으로 국가 수익의 70%가 낭비되고 국고는 파탄 났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귀금속을 담보로 계속 빚을 지고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저급한 동전을 찍어내니 인플레이션이 가중돼 물가와 세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영주권과 귀족 작위를 팔기 시작한다. 돈 주고 관직을 산 외국인들이 나랏일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국민 불만이 불거진다. 결국 1596년 또 파산선언을 하고 17세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독립한다. 로마 이래 가장 강력했던 스페인 제국이 불과 한 세기 만에 유럽의 이류국가로 몰락한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살 수 있었던 당시, 가장 손쉽게 살 수 있었던 계급이 바로 이달고, 기사 계급이다. 돈키호테가 태어난 배경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2002년 노벨연구소가 세계 50여 나라 100명의 유명 작가에게 세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 10편을 설문한 결과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 카프카, 톨스토이를 제치고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소설이다. 삼각형의 욕망 이론으로 유명한 르네 지라르는 이 작품 이후에 쓰인 소설은 이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나, 그 일부를 쓰는 것이라고 평했다.

세르반테스는 서문에 이 세상과 속인들 사이에서 기사 소설이 차고 넘치며 권위를 갖는 것을 무너뜨리겠다.”라고 집필 동기를 밝힌다. 1605년 전편 52장의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빛을 본다. 두 번의 출정과 두 번의 귀가로 구성됐다. 쉰 살로 기사 소설을 너무 읽어 머리가 돌아버린 주인공이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돕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성주라고 상상한 객줏집 주인에게 기사 서임을 받고 이웃집 농부인 산초를 영주가 되게 해준다고 꼬여 종자로 삼아 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동네 친구들, 즉 사제와 신부가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만다. 소 우리에 갇혀 달구지에 실린 채로.

10년 뒤 발간된 속편은 74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 집에 돌아온 돈키호테가 한 달간 요양한 후 세 번째 출정을 하는 이야기다. 삼손 카라스코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돈키호테는 삼손 카라스코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광기에서도 돌아온다. 이후 “나는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묘비명은 미쳐 살다 정신 들어 죽다.’

돈은 경칭이고, 키호테는 갑옷의 허벅지 보호장비 이름이다. 결코 약해지지 않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즉 주인공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 신이 인간을 창조하듯 이름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본 대로 상상하고 또 그렇게 믿는 대로 나아간 주인공이다.

들판의 풍차를 보고 삼십 개가 넘는 거인들이라고 말하고, 이발사의 대야를 투구대야라고 정의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것으로 보이겠지.”라고 말한다. 돈키호테는 모험에서 대부분 패배하지만 다시 일어난다. 원대한 꿈을 좇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실패나 좌절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가 아니라 행동하는 나를 표현한 것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행동하는 양심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속편에서 돈키호테는 바르셀로나 해안에서 삼손 카라스코가 분한 백월의 기사에게 패하는 순간, 더 이상의 모험을 포기하고, 행동할 수 없으므로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작품은 전에는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만 지금은 말한 바와 같이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일세.”라며 끝맺는다. 전편의 제목 이달고는 후편에서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죽을 때야 주인공은 인류를 위해 선을 행한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능력이 부족해 환경의 몰이해로 결국 굴복해 죽은 자는 알론소 키하노이지 돈키호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만든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16세기를 거쳐 영광의 뒤안길로 접어드는 17세기 펠리페 3세까지 극한 부침의 스페인을 온몸으로 산 작가다. 당시 스페인은 전지전능한 종교재판과 검열이란 비인간적 정치권의 압박이 판치던 인간성 말살시대였다. 종교적 통일을 이룬다는 미명하에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유대인과 무슬림을 1492년 모두 내쫓는다. 그 시기,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처럼 똑똑해서도, 그들이 했던 일조차도 따라 해선 안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개종한 유대인 가문인 세르반테스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24세에 군대에 자원 입대한다. 그해 10월 레판토 해전에 참전, 왼쪽 어깨에 입은 총상으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5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알제로 끌려가 5년간 노예 생활을 한다. 33세에 겨우 몸값을 치르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지독한 가난뿐. 무적함대 물자 조달과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세금 징수원 일로 연명한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밀을 당국 허가 없이 징발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서 파문당하고 부당한 옥살이도 하다, 1597년 감옥에서 돈키호테 집필을 구상한다. 160558세에 돈키호테를 출판하고, 1615년 속편을 발간한다. 이듬해 1616422일 세상을 떠난다. 길바닥에 떨어진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주워 읽을 만큼 열렬한 독서광이었기 때문에 돈키호테라는 동서고금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출간 당시 희극으로만 치부됐으나 18세기 영국인과 이후 독일 낭만주의자들로 인해 빛을 보게 된다.

 

돈키호테에는 명대사가 참으로 많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듯이, 희망은 시련 속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고통을 받는다고 절망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며, 그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절망에 몸을 맡기는 것은 가장 소심하고 한심한 일이다.”

오늘, 가혹한 운명도 그 속에 내일 성공의 발판이 담겨 있다.”

진정한 용기란 겁쟁이와 무모함의 중간에 있다.”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 상상 속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톨레도에 도착한다. 마드리드의 남쪽. 도시 자체가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에 둘러싸인 성곽도시다.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였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스페인에 정착했던 화가 엘 그레코가 사랑했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톨레도는 톨레툼(Toletum)’이라는 로마제국의 도시로 출발한다. 서로마 제국 말기 일어난 게르만족 대이동의 주역인 서고트족이 451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이동해 457년 수도로 삼는다.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간다. 1035년 후우마이야 왕조 멸망 이후 베르베르계 바누 딜눈 가문이 톨레도를 중심으로 독립국인 톨레도 타이파를 세우지만,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가톨릭 세력으로 재편입되고, 카스티야의 수도가 되면서 이베리아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로 우뚝 선다.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만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수도 지위를 상실한다. 스페인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기에 가톨릭과 유대교, 이슬람교 유적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고대부터 품질 좋은 강철과 도검을 생산한 곳으로 유명하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 때까지도 톨레도산 검은 최고의 명품이었다. 현재도 시내 중심부에서 검과 철제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실전용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용이거나 관광기념품용이다.

 

시가지가 구릉에 자리하고 있어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이나 타고 올라간다. 파란 하늘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 그 아래 엷은 오렌지빛으로 펼쳐진 톨레도 풍경이 예쁘기도 하다. 역시 풍경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제맛이다. 시내로 들어가면 삼각형 모양의 널찍한 르네상스 양식의 소코도베르광장이 나온다. ‘황소가 뛰던 축제의 현장이란 뜻이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허기진 배도 채울 겸 맥도날드로 달려간다.

 

 

 

 

 

 

 

 

 

 

 

 

 

광장 테라스에서 햄버거로 맛있는 점심을 즐긴 후 저 멀리 올려다보이는 톨레도 대성당을 향해 굽이굽이 좁다란 구시가지 골목을 누벼 본다.

 

 

 

 

 

 

 

 

 

 

 

 

 

중세 유럽에 온 듯 층층이 쌓아 올린 돌담벽이 이국적이다. 강철과 무기의 도시답게 매장마다 기다란 칼을 비롯해 중세 무기나 방어구 등이 온통이다. 다마스키나도 톨레다노(상감 세공)도 눈에 들어온다. 톨레도 전통 공예 중 하나다. 본래 표면과 대조적인 색상이나 재료로 화려한 무늬를 입히는 기술이다. 톨레도의 상감 세공은 검은색 바탕에 금이나 은을 입혀 만든다. 아들 녀석 선물을 하나 사야겠다. 칼은 너무 커 접어두고 조그만 새총이 나을 듯해 집어 든다. 좋아하려나 모르겠다.

 

 

 

 

 

 

 

 

 

따가운 해를 피해 골목골목 그늘을 골라 걷는다. 건물마다 창문엔 커튼이 쳐져 있다. 50도가 넘는 따가운 햇살만 막으면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시원할 정도란다. 그래서 이 더운 나라에서 에어컨 장사가 안된다는데. 그도 그럴 것이 건물 바로 밑으로 음지를 찾아다니면 덥다는 느낌이 없다.

 

 

 

 

 

 

 

 

 

그렇게 음지로 음지로 피해 다니다 도착한 곳은 무데하르 양식의 대표적 건물인 산토 토메(성 토마스) 성당.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성당은 대궁궐처럼 으리으리한데 이곳 산토 토메 성당은 조그맣다. 입구에 엘 그레코 최대, 최고의 걸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벽화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산토 토메 교회의 수호성인이며 25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신실한 오르가즈 백작(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위해 성 스테판과 성 어거스틴, 두 명의 성인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벽화는 위쪽 천국과 아래쪽 지상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갑옷을 입은 창백한 시신이 땅속으로 내려지는 동안 그의 영혼은 천국의 가장 위에 있는 예수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겨자 빛이 나는 노란색, 선홍색, 어두운 파란색이 어우러진 튀는 색조가 이 장면을 어둠 속으로 삼켜버리는 검은 배경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뒤쪽 군중 사이에서 화면 밖을 응시하는 얼굴은 엘 그레코의 자화상이다. 횃불을 들고 왼쪽 아래 서 있는 아이는 엘 그레코의 아들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검은 성모상도 있다.

스페인어로 그리스 사람이란 뜻의 엘 그레코. 원래 이름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1541-1614). 크레타섬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사랑했던 마드리드의 외곽 작은 도시 톨레도에서 생을 마쳤다. 1577년 그가 이주했던 톨레도는 당시 스페인의 종교 중심지였다.

 

다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골목을 돌아 톨레도 대성당으로 향한다.

 

 

무려 90미터 높이의 종루가 시내를 굽어보는 이 성당은 원래는 이슬람의 모스크였지만 13~15세기 성당으로 개축된다.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따라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해 1493년 완성된 것이다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의 손길을 거쳐 현재의 엄청난 규모와 모습을 갖춘다현재는 스페인 가톨릭의 본부 역할을 한다. 대성당 입구는 3개의 문이 있다. 왼쪽은 지옥의 문, 중간은 용서의 문, 오른쪽은 심판의 문. 지은 죄가 많아 용서의 문을 통과하고 싶은데, 특별한 날에만 개방한다니, 속죄는 다음 기회에.

 

성당 안은 어느 대성당이 다 그렇듯 높디높은 천장에 입이 떡 벌어진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현시대(Custodia)’가 보관돼 있다. 성체(성령)가 강복(복을 내리는 것)할 때 성체를 올려놓는 대다. 5천 개의 금, ,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kg, 높이가 3m나 된다. 성가대실로 가는 쪽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크리스토퍼 성인이 서 있다. 성가대실 앞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웃는 성모상이 있다. 13세기 초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이곳에 기증됐다.

 

양 벽면에 달린 파이프오르간 중 왼쪽 화려한 것은 바로크 양식이고, 오른쪽 절제된 것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성가대실 의자에는 가톨릭의 그라나다 재정복 과정을 한 장면 한 장면 조각해 놓았다. 성가대 의자는 호두나무로 만들었다. 단단하고 모양이나 색도 참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성가대석은 ‘ㄷ’자 모양으로 빙 둘려 있다. 양쪽 위로는 오르간이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등 생애를 묘사한 조각들, 성모상, 성모승천 등의 조각상이 있다. 

 

 

 

 

우리 눈을 가장 즐겁게 해주는 것은 대리석과 석고로 제작한 제단 장식 엘 트란스파렌테. 성당 높은 천장까지 벽화가 가득 채워지고 꼭대기에는 구멍을 뚫어 자연채광이 쨍쨍한 조명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18세기 천재 건축가 나르시스 토메가 설계한 것이다. 빛의 기울기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건축기법이다. 자연채광은 아래 재단을 비추도록 했다. 마치 영적인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미사가 시작할 시간이 되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에 빛이 든다.

 

 

 

 

 

 

 

 

 

중세 유럽의 도시를 뒤로하고 이제 현대의 도시, 아니 중세와 현대가 잘 어우러진 마드리드로 향한다.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가니 건물 층층마다 다른 모양의 창문이 달려있어 이채롭다. 시가지 골목 골목마다 모두 박물관인 듯해 사진에 담아본다.

시내 곳곳에는 거리 공연자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한쪽에서 댄스공연이 펼쳐지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경찰차가 순찰하며 이들을 해산시킨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여행길이지만 피곤함을 찾을 수 없다. 유럽이니까. 어느새 마드리드 시청사까지 들어왔다. 붉은 벽돌 건물의 카사 데 코레오스. 원래 왕립우체국이었다. 건물 꼭대기 시계탑은 저녁 73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전히 날이 밝다. 스페인에서 여름철에 경험할 수 있는 백야 현상이다. 시청사 앞에는 카를로스 3세가 말을 타고 솔광장(푸에르타 델 솔)을 향하고 있다. 카를로스 3세는 절대왕권을 꿈꾼 스페인의 계몽 군주다. 수공업자를 천시하던 규정을 폐지해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터준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근대 우편제도를 시행했다. 그래서 옛 우체국 건물 앞에 그의 기마상이 있나 싶다.

 

 

 

시청사 앞에 아홉 개의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 바로 제로포인트가 있다. 이곳을 밟으면 다시 마드리드에 올 수 있단다. 밟지 못했으니, 내 생애 스페인을 다시 가진 못할 모양이다. 로마 트레비 분수에서도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 해서 동전을 던져봤는데. 이곳 제로포인트는 밟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밤늦은 시간까지 마드리드 시내를 둘러본다. 여행 선물을 사느라 백화점으로, 쇼핑몰로, 약국으로. 그리고 샹그리아 한 잔 기울이며 안타까운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로한다. 진 곳을 디딜세라 박물관 같은 건물 바로 위에 나지막이 솟아오른 보름달이 시내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환히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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