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28.
스페인 여행기 3
간밤에 잃어버린 캐리어 때문에 모두 표정이 밝지 않다. 함께 걱정해 주고 달래 주며 그라나다 일정을 예정 대로 소화한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그라나다주의 주도다. 지명은 ‘석류’를 뜻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 석류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라나다의 문장에도 석류가 그려져 있다.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와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무어무슬림족이 가장 긴 기간을 지배한 곳이기도 하다.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했던 서고트 왕국은 711년 내부 갈등과,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붕괴한다.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전쟁의 본질은 그 옛날 아브람의 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람은 아이를 원했지만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 사라의 권유로 여종 하갈로부터 86세의 나이에 아들 이스마엘을 얻는다. 99세가 되던 해 신이 그에게 나타나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100세에 정말 아들을 얻는다. 이삭이다. 아브람은 이때 신과의 약속에 따라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한다. 노아의 후손으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신의 부름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나가 그의 민족을 부흥시켰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얘기다. 이삭을 낳은 사라는 여종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구박한다. 결국 둘은 쫓겨나 사막에서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신은 서자인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그의 민족을 일으킬 복을 내려준다. 이슬람의 조상이 되도록 한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병 주고 약을 주다니, 참으로 씁쓸하다.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질 족보를 계승한다. 창세기에 있는 얘기다. 두 종교집단은 태초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는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즉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611년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 살던 무함마드는 히라산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그 뜻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현재 18억 명의 신자를 거느린 이슬람교가 탄생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622년 반대 세력을 피해 메디나로 떠나 포교의 중심지로 삼는다. 헤지라, 이슬람의 원년이다. 630년 다시 메카에 무혈 입성해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 면모를 보인다. 이후 이슬람은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동서로 빠르게 뻗어나간다.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그래서 이슬람권에서는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없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이베리아에서는 서고트가 톨레도를 수도로 본격적으로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종교는 정통 가톨릭과 달리 예수를 성부에 종속된 존재로 여기며 삼위일체 개념을 부정하는 아리우스교를 신봉한다. 하지만 레카레도 왕이 세비야의 대주교였던 레안드로 앞에서 개종하면서 정통 가톨릭 국가의 길을 걷는다. 다만 왕위세습제가 정착되지 않은 관계로 왕은 세습하려 하고, 귀족들은 게르만 전통에 따라 왕을 선출하려 한다. 양측의 마찰은 불가피하다. 300년간 무려 34명의 왕이 왕좌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반복적인 유혈 투쟁으로 서고트 내부는 점점 분열된다. 8세기 초 에히카왕은 주변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아들 위티샤에게 물려주고, 위티샤 역시 자신의 아들인 아킬라에게 물려주려 한다. 이에 참다못한 로드리고 공작이 710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당시 서고트족의 수도인 톨레도의 협곡 아래는 플로린다라는 아리따운 여인이 하녀들과 목욕하다 굴욕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반란으로 서고트 왕이 된 로드리고가 결혼하겠노라 꾀어내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그녀는 쓸쓸히 버림받는다. 슬픔에 빠진 그녀는 아버지에게 썩은 달걀을 보내 당한 수모를 비유적으로 알린다.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의기양양했던 로드리고는 이 경솔한 행동 때문에 왕국에 재앙을 몰고 올지 모르고 있었다.
로드리고의 반란으로 위기에 빠진 위티샤 측은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이에 이슬람 베르베르족의 족장인 타리크는 군사를 이끌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로 넘어온다. 이슬람이 이베리아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이베리아에서 거의 800년간 이어진 이슬람과 가톨릭 간 전쟁의 서막이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지 100년 만에 무섭게 성장한 이슬람 세력과, 권력투쟁으로 흩어진 가톨릭 세력 간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내분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 이베리아에서. 타리크는 711년 베르베르족과 이슬람 귀족의 군대를 이끌고 높고 뾰족한 산이 솟아 있는 해안을 통해 이베리아에 상륙한다. 후에 사람들은 그 산을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으로 제베 알 타리크라고 부른다. 이 발음이 변해 지금의 지브롤터가 된다.
단단한 요새와 같은 지브롤터해협을 이슬람 군대가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부자 때문. 지브롤터 건너편 아프리카에 세우타라는 도시가 있다. 지금도 스페인 영토로 서고트 왕국 시절 군대가 정주하던 군사 요충지다. 그곳을 군사적으로 유능한 훌리안 백작이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훌리안의 딸이 병을 고치러 수도 톨레도에 가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딸이 보낸 선물상자에 썩은 달걀이 들어있다. 왕 로드리고가 욕보였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훌리안. 반대파였던 위타샤 측과 손잡고 그들이 끌어들인 이슬람 세력에 협력한 것이다. 그리고 711년 카디스의 과달레테전투에서 로드리고가 패배한다.
이슬람 군대에 협력한 위티샤 측과 훌리안 경은 이슬람 군대에 대가를 지불하고 돌려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군대는 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명목은 포교를 위한 성전, 즉 '지하드'를 치르는 것이지만, 그들이 살던 사막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이베리아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후 서고트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712년 세비야, 코르도바, 수도 톨레도, 714년 북부의 레온, 사라고사, 타라고나, 718년 북부 산간지방을 제외하고 피레네산맥 이남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빼앗긴다. 로마에 200년 가까이 항전했던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7년. 내부 반란과 가톨릭의 유대인 탄압에 따른 분열, 전염병 창궐, 여기에 로마가 깔아놓은 촘촘한 도로망 등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해 일어난 재앙이다.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이슬람 군대의 강한 전투력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가톨릭 군대가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는다. 반격이 곧바로 이어진다. 722년 이베리아 북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돈 펠라요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가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면서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즉 '레콩키스타'가 시작된다. 프랑스에서는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이 북진해온 이슬람을 격퇴한다. 유럽 대륙을 휩쓸던 이슬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 수도인 그라나다에서 지배권을 빼앗는다. 레콩키스타가 완성된 것이다. 그라나다 언덕 위에 자리한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교도가 이베리아반도에 선물로 남긴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레콩키스타 당시 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베리아반도에서 선교한 예수의 제자 산티아고. 844년 와인으로 유명한 리오하 지방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 라미로 1세의 꿈에 산티아고가 나타나 가톨릭 전사의 승리를 약속한다. 실제 전투는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연합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산티아고는 승리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하얀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이슬람교도를 죽이는 산티아고의 모습은 후에 많은 조각과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살육하는 성인의 모습이라니. 좀 어울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묻혔다는 곳은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불린다. ‘별이 뜨는 들판’이란 뜻이다. 이곳을 목적지로 한 성지 순례길은 현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갈라시아 지방의 언어다. 라틴어로 상투스 야구부스(Santus Iacobus). 즉 예수의 제자 야곱이다.
이슬람 최후의 보루였던 알함브라에 도착한다. 알함브라 궁전은 무어인들이 꿈꾸던 지상낙원을 재현한 곳이다. 1238년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짓기 시작했다. 이후 이베리아반도 마지막 이슬람왕조였던 나스르 왕국의 보압딜 국왕까지 이어진다. 중세 스페인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이슬람 건축문화유산 알함브라. 붉은 성이라 불린다. 궁전과 성곽이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고 있다. 800년의 긴 세월 스페인에 이슬람이 남긴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어졌다. 무데하르는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시기 이베리아반도 가톨릭 왕국 내 무슬림 신민을 의미한다. 어원은 아랍어로 ‘길들여진 자’라는 뜻의 '무닷잔'에서 차용한 것으로, 다소 비하적인 명칭이다. 중세 이베리아 이슬람 왕국 내 가톨릭 신민 '모사라베'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고도의 세련된 솜씨를 가진 무데하르는 아랍과 스페인의 예술적 요소를 잘 융합한다. 말굽 모양의 아치와 둥근 천장이 특징인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 발렌시아 등지의 교회와 궁전 건축물에서 볼 수 있다.
동양에 타지마할이 있다면 서양엔 알함브라가 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런, 공교롭게도 둘 다 이슬람 건축물이네. 근데 실상 외관을 보니, 왜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하는지는 물음표다. 내 눈에는 붉은빛이 도는 돌로 쌓은 그저 그런 조악한 궁전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데. 남은 공간이 4%에 불과하다니, 당연하다.
알함브라는 그라나다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시내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반대로 그라나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궁전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절대 통치자가 모든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으려는, 아니 모든 국민의 동태를 쉽사리 살피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크게 4개 공간으로 이뤄졌다.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자 가장 전망이 좋은 요새인 알 카사바, 아라베스크 양식의 꽃인 나스르 궁전,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가 있는 왕의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 스페인 르네상스 시기의 건물인 카를로스 5세 궁전.
먼저 눈을 즐겁게 해줄 왕의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흔히 여행 가면 남는 것은 사진이고, 없어지는 것은 돈이라고, 역시 사진 찍기 좋은 곳이 여행자의 가슴을 뛰게 한다. 13세기 프랑스식으로 지어졌다. 이베리아반도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 무함마드 3세의 여름 별장이다. 물의 궁전이라고도 한다. 사막에서 발원한 터라 물을 귀하고 성스럽게 여겼던 이슬람 통치자들이 수로와 분수, 나무 조경으로 시원시원하게 꾸민 정원이다. 최고봉 무라센이 3천479m나 되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물을 수십km의 수로로 연결해 이곳까지 끌어들였단다. 그 물이 동맥처럼 이어진 수로를 통해 궁전 구석구석까지 흐른다. 성벽보다 높을법하게 도열해 나를 정중히 맞이하듯 단정하게 솟아오른 사이프러스 나무의 오솔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온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삶과 죽음, 부활을 의미한다. 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가 즐겨 그린 나무이기도 하다. 입구는 3개의 향나무 아치가 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소문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원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향나무 아치는 하나를 만드는 데만 60년이 걸린다니, 정원을 만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정원으로 들어서니, 길 양편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늘어서 있다. 마치 푸른 벽처럼. 가운데는 물이 흐르는 수로가 있고, 분수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연못 주변의 반듯한 낮은 울타리는 회양목, 외곽의 높은 울타리는 측백나무로 둘려 있다. 울타리 너머에는 알함브라와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뾰족탑의 나스르 궁전도 보인다. 왕의 집무실이자 생활공간이었다.
다시 정원 안쪽에서 들어와 연못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영롱한 물소리가 들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침 일찍 왔기 때문에 관람객이 별로 없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곳곳에 다양한 모양의 아치형 분수가 압권이다. 계속 가면 정원의 심장이라 불리는 아세키아 중정. ‘아세키아’는 ‘레알’ 즉 진짜를 뜻한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서인지 건물은 오히려 허술해 보이기까지 한다.
중정 앞에는 마차 주차장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말이 먹을 물을 가득 담아놓은 돌구유도 있다. 아세키아는 물길을 뜻하기도 한다. 기다란 정원의 중앙에 좁은 수로가 길게 뻗어 있어 이를 짐작게 한다. 좌우로 12개가 넘는 분수가 가느다란 물줄기를 아치 모양으로 뿜어 올리고 있다. 전기장치 없이 순전히 자연 수압으로 솟구치는 자연 분수다. 주위에는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올라가고, 온갖 꽃들이 피어 있다. 물과 정원수가 어우러진 이슬람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 사진으로 담아보기에 딱 좋은 멋진 풍경이다.
끝에 있는 중정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창이 없는 아치형 틀 사이로 그라나다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아치 속 시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보려 스마타폰 카메라 성능을 탓하면서도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며 부산을 떨었더니, 꽤나 괜찮은 사진을 건졌다.
이어지는 이슬람식 술타나 정원에는 한쪽 벽에 수백 년은 버텨온 듯한 나무가 앙상하게 뼈대만 서 있다. 이 나무 아래서 근위대 귀족이 술탄의 후궁과 몰래 사랑을 나누다 들켜 처형된다. 그들의 잘린 머리는 나무에 매달린다. 몰래 한 사랑의 대가다. 그들은 지금 또 어느 하늘 아래서 몰래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나무가 앙상한 것은 몰래 한 사랑의 장소를 제공했다는 죄로 뿌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나무는 또 무슨 죄라고….
정원을 나가는 길에 류도화 터널이 예쁘다. 보기엔 예쁜 정원이지만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터널이다. 류도화는 독초다. 주로 암살하는 데 쓰였단다.
역사 이래 모든 나라의 멸망은 내분에서 비롯된다.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11세기 이슬람은 내분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군주 한 명이 통치하던 칼리프 왕국이 사라지고 여러 소왕국으로 분할돼 도시마다 군주가 난립하게 된 것. 마지막까지 기독교 세력과 맞서 싸웠던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스르 왕조를 이끈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술탄 아부 알 하산 알리와 그의 아들 보압딜(무함마드 12세)의 권력투쟁. 보압딜이 아버지 하산을 몰아내고 스스로 술탄에 오르자, 하산은 동생이 지배하던 말라가로 피신했다가, 그라나다와의 내전에서 가톨릭 세력의 도움을 받아 아들 보압딜을 내쫓고 다시 술탄에 오른다. 이 와중에 가톨릭 세력은 알라마, 세테닐을 함락하고 나스르 왕국을 압박하면서 감금했던 보압딜을 석방해 나스르 왕국의 내분을 일으킨다. 가톨릭 세력의 론다 함락 이후 하산은 다시 폐위되고 그의 동생 엘 사갈이 무함마드 13세로 술탄에 오른다. 하지만 1487년 말라가를 뺏긴 후 다시 조카인 보압딜에게 술탄의 자리를 내놓는다. 보압딜은 무함마드 12세로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 된다.
이같은 이슬람 소왕국 혼선의 시기에 프랑스 쪽 이베리아반도 북부에서 힘을 키운 가톨릭 세력이 남하해 레온왕국, 카스티야왕국, 아라곤왕국, 나바라왕국, 카탈루냐왕국으로 발전하면서 이슬람 세력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1236년 코르도바, 1248년 세비야까지 진출해 그라나다만 남는다. 1469년 이베리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쥐고 있던 두 왕국이 혼인동맹을 맺는다. 카스티야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왕국의 페르난도 2세.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왕국이 통합돼 1479년 부부가 가톨릭 공동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들은 그라나다 인근에 신도시이자 포위망인 산타페를 건설, 이슬람의 마지막 숨통을 조여간다. 1492년 새해 첫날 밤, 마침내 보압딜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궁전을 바치고 항복한다. 그 해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보압딜은 아프리카 모로코로 쫓긴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으면서 지금 ‘통한의 언덕’으로 불리는 곳에서 “그라나다를 잃은 것보다 알람브라 궁전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이 더 슬프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내가 그였다면 알람브라 없이 사느니 차라리 알람브라를 무덤으로 삼았을 것이다”라고 비아냥거렸단다. 보압딜은 모로코 이슬람 도시에 알함브라를 모방한, 하지만 알함브라에 한참 모자란 페스라는 궁전을 지어 살다 63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이사벨 여왕은 약속과 달리 이슬람교도 소탕에 나선다. 하느님의 땅을 지킨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무자비하게 이슬람교도를 박해하고 살육한 것. 보석 같은 알람브라 궁전만 빼고. “내 생애보다 더 귀한 궁전에는 더 이상 손댈 게 없다”라며….
나스르 궁전을 뒤로한 채 반대편 류도화 터널을 지나 이제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향한다. 한쪽에 기다란 아치 터널이 늘어서 있다. 왕의 수로다. 아치 모양인데 아래는 직각의 페르시아 양식이고, 둥근 아치는 로마 양식이다. 그래서 로마의 물길과도 흡사하다는 느낌이다. 우리네 수로와도 비슷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로는 대부분 비슷한 형태다.
가는 길에 복원되지 않은 널따란 건물터도 눈에 띈다. 물길은 계속 이어진다.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은 르네상스풍으로 마치 원형 투우장 같다. 스페인은 왕위 계승 문제로 주변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후계가 제대로 안 잡힌 적이 제법 많다. 당초 4개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기 때문이다. 첫 통일왕국은 카스티야 이사벨과 아라곤 페르난도의 결혼 동맹으로 이뤄진다. 통일왕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느슨한 연합왕국이다. 콜럼버스 대항해시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시기다.
비록 통일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머지 두 왕국은 이를 반대했지만. 아무래도 이사벨 여왕이 남편보다 더 기가 셌던 모양이다. 딸만 낳았고, 그 딸들은 정략결혼으로 내몰렸지만, 이 중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가 후아나. 이사벨 여왕이 죽을 때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아 여왕으로 즉위한다. 남편 펠리페와 함께 공동 왕으로. 여기에 아버지 페르난도까지 공동 왕 구도를 만들며 두 사람은 실권을 쥐기 위해 후아나를 미친 여왕 취급을 한다. 하지만 공동왕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펠리페가 급사한다. 페르난도의 독살설이 나도는 이유다. 후아나는 죽은 남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체와 살아가는 광기를 보인다. 이처럼 미친 후아나의 통치가 힘들다고 판단한 시댁 합스부르크에선 6살짜리 후아나의 아들 카를을 왕위에 앉힌다. 이를 기회로 페르난도가 섭정에 나선다. 이후 페르난도는 재혼해 아들을 낳아 왕위를 물려줄 야심을 품지만, 그 아들이 요절하고 만다. 페르난도는 카를에게 왕위를 돌려 줘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그가 바로 카를로스 5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왕국의 공식적인 제1대 국왕, 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로 불린다.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업적을 쌓은 황제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후아나는 합스부르크왕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스페인에서 키워지지 않았기에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스페인 왕이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카를로스 5세가 알함브라에 자신의 신혼여행을 위해 궁전을 지은 것이다. 바로 이곳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알함브라 내 유일한 초기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다. 외관은 정교하고 웅장해 보인다. 외벽 곳곳에 고리가 걸려 있는 것이 옥의 티랄까. 알고 보니 그 고리는 손님들을 위한 말 고리다. 요즘으로 치면 주차장인 셈이다. 바실리카 양식의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웅장한 겉모습과 달리 텅 빈 느낌의 원형 공간이 나온다. 30m 길이의 정원을 2층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단순한 형태다. 32개의 둥근 기둥이 동그란 마당을 감싸고, 2층으로 된 원형 공간을 두른 안마당이 하늘을 담고 있다. 안마당 중앙에서 말하면 웅장한 음이 나온다니, 공연장으로 활용 하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카를로스 5세는 자신의 신혼여행을 위해 이 궁전을 지었지만, 스페인이 몰락하면서 정작 자신은 단 하루도 이곳에서 보내지 못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왼쪽에 박물관이 있다.
이제 알함브라에서 가장 높은 알카사바로 향하는 길. 그 시절 대포가 전시돼 있어 이슬람 마지막 항전의 요새였음을 알려준다. 마그레브양식인 아치 열쇠 구조의 무기문을 지나면 숙소, 무기고 등의 건물터가 남아있는 아르마스 광장이 펼쳐진다.
알카사바는 가파른 능선을 따라 지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라나다를 차지한 나스르 왕조가 가톨릭 군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건설한다. 정식으로 왕국을 만들기 전 술탄과 왕실 가족이 군대와 함께 거주하던 곳이라 알함브라의 다른 곳과 확연히 다른 초기 성채 도시 모습이다. 24개의 망루와 군인 숙사, 무기 저장고 탑, 목욕탕 등이 있어 전성기에 4만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적의 동태를 살피던 벨라탑은 이제 여행자가 전망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마을은 무척이나 환상적이다.
새하얀 건물이 아기자기하게 터를 잡은 이슬람 마을 알바이신 지구가 눈에 띈다. 그라나다의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시가지다. 그라나다 시내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다. 알바이신 지구가 북동쪽에 있다. 그라나다 대성당이 있는 구도심은 가톨릭 문화권으로 시내 중심부를 차지한다. 바로크 양식의 그라나다 대성당은 원래 이슬람 사원의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1523년부터 180여 년에 걸쳐 신개축한 것이다. 대성당 옆 왕실 예배당(Capilla Real)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부부, 차녀 후아나 1세와 사위 펠리페 1세 등이 누워있다.
남쪽으로는 유대인 문화권이 있다. 각기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1천 년의 모습을 간직했지만, 집 모양은 거의 비슷하다. 스페인 양식인 셈이다. 그 외에 또 하나의 언덕이 있다. 사크로몬테 언덕. 정처 없는 떠돌이 집단인 집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사벨 여왕이 이들에게 이슬람을 내쫓는 전쟁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이 언덕에 정착해 살도록 허락했단다. 이곳에선 지금도 집시 후손이 사는 동굴집인 쿠에바가 있고 플라멩코 공연도 볼 수 있다.
알카사바는 대부분 집터 형태로 남아있다. 이사벨 1세는 가장 상부에 있는 벨라탑에 국토 수복을 상징하는 깃발을 꽂았다고 한다. 현재는 유럽연합과 스페인, 그라나다, 안달루시아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시내 전망을 즐기는 사이 캐리어를 잃어버린 일행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캐리어의 행방을 찾은 것 같다는…. 하지만 아직도 언제 어디서 받을 수 있을지는 요원하기만 하다. 모두 우려감 속에 기대감이 한층 높아진 상태로 알함브라와의 이별을 고한다.
출구는 ‘정의의 문’. 이슬람 문화를 성경 문화로 바꿔놓은 곳이기도 하다. 역시 열쇠 모양이다. 성문 맨 위에는 오른손이, 그 밑에는 성모마리아 상이 있다. 주변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도 눈에 띈다. 현빈이 이곳 궁전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드라마를 찍었다니, 웨딩 촬영 명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인과관계가 그 반대인가? 아무튼 경사도로를 계속 내려오면 알함브라 궁전의 견고한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철이 함유된 흙으로 벽을 지었기 때문에 성벽이 붉게 보여 붉은 성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알함브라의 여운을 남긴 채 이슬람풍의 장식과 정원, 흰색의 높은 벽을 가진 주택들이 늘어선 곳을 지나고, 미로 같이 좁고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와 시내로 들어간다.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원형 분수도 있다. 이어지는 시내 풍경 역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도로 한 가운데 정원처럼 그늘진 넓은 인도가 있고 그 양옆으로 차도가 있다. 다시 또 가로수 그늘과 그 아래 어김없이 쉬어갈 벤치가 있는 상가 인도가 펼쳐진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도 이런 형태의 풍경을 본 듯하다. 오전 내 걸어 다녔더니 허기가 느껴져 피자집을 찾는다. 1인 1 피자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커 많이 남긴다. 피자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선 1인 1 피자가 양이 딱 맞았던 것을 떠올리며 그 정도의 크기를 생각했는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같은 유럽에서도 차이가 있구나. 맛도 이탈리아에선 별로였는데 이곳 피자는 우리 입맛에 딱이다. 식사 후엔 커피타임. 여행사의 정해진 식당을 모조리 취소한 것이 주는 여유다. 코나 카페. 그라나다에서 맛있는 커피숍으로 이름난 곳이다.
야외 테라스석이 있어 더욱 좋다. 커피엔 문외한이어서 일행들이 많이 시킨 걸로 한 잔. 스페인에선 꼬르따도 커피를 즐겨 마신단다. 에스프레소의 풍부한 스팀 밀크의 부드러움이 결합해 특유의 맛과 향이 느껴진다. 마키아토와 비슷하단다. 츄러스나 또라를 곁들이면 더욱 좋다고. 우리나라 축제장 등에서 볼 수 있는 츄러스는 사실 또라다. 진짜 츄러스는 이보다 훨씬 적다. 바삭바삭한 튀김 반죽으로 만들어져 단독으로도 맛있지만 따뜻하고 진한 초콜릿 소스와 함께 먹으면 훨씬 맛있다. 어느 호텔에서나 조식에서 항상 맛볼 수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으로 둘러싸인 습한 도시로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눈이 오는 곳인 그라나다도 이제 이별을 고할 때가 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여 동안 론다로 달린다. 가는 내내 올리브 농장이 가없이 펼쳐진다. 스페인은 전 세계 올리브 생산량의 63%를 차지할 만큼 올리브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막의 이슬람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여겨진다. 산마다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올리브숲이 빼곡하게 우거져 있다. 버스 차창 너머로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이다.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다.
론다와 가까워지면서 구불구불 산길이 나온다. 멀미를 피하려고 론다를 배경으로 한 ‘연금술사’란 책에 빠져본다. 브라질 출신의 거장 파울루 코엘류는 ‘연금술사’를 저술해 전 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젊은 양치기 산티아고의 모험 이야기다. 론다, 세비야 등의 도시가 배경이다. 산티아고의 모험을 통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꿈꾸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너무나 흔하고 뻔한 이야기다.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에 사랑이 빠지고, 아프로디테에게 소원을 빌어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 조각상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리스신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처럼….
산티아고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신학교에 다녔지만, 여행을 좋아해 신부가 되지 않고 양치기 소년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집시와 살렘 왕을 만나는 꿈을 꾸고 그게 예언이라 생각하면서 보물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 아프리카 가까운 도시까지 갔다가, 도둑에게 가진 것을 다 뺏긴다. 돈을 벌기 위해 크리스털 상인을 만나 그의 가게에서 일하는데 일을 워낙 잘해 계속 머무를 수 있었지만 안주하지 않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사막 오아시스에서 사랑하는 여인 파테마와 연금술사를 만난다. 연금술사의 제자가 돼 그 비밀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그토록 원했던 보물을 찾기 위해 이집트 피라미드까지 갔지만 보물을 찾진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자주 찾았던 교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물을 찾는다. 하지만 산티아고의 여행은 결코 헛된 고생만은 아니었다. 결론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금술사’에 잠시 빠져있던 정신은 다시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둥글둥글한 소나무로 옮겨간다. 스페인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츄파춥스가 이 소나무로부터 유래했단다.
참으로 먼 길을 달려온 론다엔 누에보 다리가 있다. ‘새로 만들어진 다리’라는 뜻으로 아치 형상에 높이가 103m나 된다. 엘 타호 협곡 위에 40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 완성됐다. 주변에 헤밍웨이 산책로가 있고 헤밍웨이가 직접 묵었다는 집도 있다. 해발 739미터 높이에 협곡과 절벽을 끼고 있는 소도시 론다. 절벽과 협곡은 과달레빈강이 천연으로 빚은 천혜의 절경이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대엔 평온한 농촌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래서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곳이다. 절경도 절경이지만, 투우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투우 광팬이었다. 누에보 다리 바로 앞에 거대한 투우장이 있다. 그래서 소꼬리찜 요리가 유명하다. 동물 학대를 이유로 많은 곳에서 금지되고 있지만, 지금도 이곳 론다를 비롯한 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에서는 투우 경기를 하는 곳이 있다. 헤밍웨이는 누에보 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하얀 주택에 기거하면서, 누에보 다리를 거닐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절경을 구경하고, 산책로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투우 경기도 관람하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다. 누에보 다리를 보는 순간, 과연 헤밍웨이를 매료시킬 만한 절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밍웨이는 “론다는 연인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예찬했단다.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 보니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다.”라는 소설 속 명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 론다. 그래서 요새다. 당연히 뺏고 빼앗기는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런 역사를 떠올리며 다시 보니, 절경이 아니라 아찔한 낭떠러지다. 기원전 2세기, 한니발 시대부터 방어를 위한 최적의 요새 역할을 한다. 로마 시대 카이사르(시저)는 처음으로 이곳을 ‘론다’라 부르며 진지를 구축한다. 1485년에는 아랍의 이슬람 땅에서 스페인의 가톨릭 땅으로 바뀐다. 이베리아에서 이슬람인이 완전히 철수하기 7년 전이다. 주변 코르도바나 세비야가 일찌감치 가톨릭 땅으로 바뀐 것에 비하면 늦은 시기여서 막강한 요새였음을 보여준다. 이후 론다는 이베리아에서 큰 전쟁이 없어짐에 따라 요새로서 가치를 잃고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1930년 스페인 내전으로 다시 등장한다. 내륙의 산속에 위치하고 방어하기 좋은 요새이기 때문에 이곳을 두고 양측이 공방전을 벌인다. 당시 내전에 참여했던 헤밍웨이는 이곳을 배경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다. 종 ‘toll’은 죽음이나 장례식을 알릴 때 아주 느리게 4~5초 간격으로 울리는 타종을 뜻한다. 즉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어감과는 사뭇 다른 슬픈 종소리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내전이 끝난 다음 1940년 10월, 이 소설을 발표한다. 론다에서 집필을 시작해 쿠바에서 마무리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7년 5월,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 과다라마산맥의 론다 계곡. 미국인 로버트 조던은 프랑코 정권에 반항해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철교 폭파 명령을 받는다. 근처 계곡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공산주의 게릴라 대원들이 그를 돕는다. 게릴라의 대장 파블로는 한때 파시스트와 싸우며 용맹을 떨쳤으나 자기 손에 죽어 간 사람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게다가 작전이 시작되면 다른 곳으로 근거지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조던에게 비협조적이다. 대원들과 갈등도 있다. 조던은 게릴라캠프에 있던 마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마리아는 파시스트들에게 마을 시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능욕까지 당한 처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철교는 열차가 통과하는 순간 무너진다. 조던 동료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다. 조던은 생존해 마리아와 사랑을 이어가려 하지만, 그의 미래는 불투명한 것으로 끝맺으며 여운을 남긴다.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창립 40주년(1943년) 기념으로 제작한 영화에선 탈출 과정에 조던(게리 쿠퍼 역)의 말이 적의 포탄에 맞아 쓰러지고, 조던의 다리가 부러진다. 저 멀리서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 역)는 절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 떠나가고 만다. 의식을 잃어가던 조던은 추격병을 의식하면서 기관총을 집어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마을 성당의 종이 울리며 막이 내린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울리는 조종. 죽음의 종소리를 들을 때 누구를 위한 종소리인지 묻지 말라는 것이 헤밍웨이의 메시지다.
론다는 워낙 작은 도시이다 보니 보통은 당일치기로 여행한다. 사실 누에보 다리와 짤따란 헤밍웨이 산책길, 주변 절경 등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꿈에라도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누에보 다리 바로 앞에 자리해 다리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파라도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신시가지를 둘러본다.
파라도르 데 론다. 시청사를 개조해 나라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어서 역사적으로 오래됐지만 낡아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앤티크한 분위기가 멋스럽다. 안달루시아 깃발 등이 정면에 게양돼 있다. 밖에서 바라보면 2층 건물로 보이지만, 프런트와 지하 식당까지 하면 총 5층 규모이고, 야외 수영장도 운영하고 있다. 일행들이 수영복도 챙겼다는데, 시골 마을이어선지 운영 시간이 짧아 이용하지 못 한 것을 아쉬워한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 파라도르 호텔 사이로 이어지는 절벽 위 오솔길을 걸어본다. 헤밍웨이 산책길이다. 반대편 언덕 오른쪽 끝 하얀 집에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숙소가 있다. 멋들어진 절벽 아래 절경을 보며 거니는 산책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니, 왼쪽에 헤밍웨이의 기념상, 오른쪽에 미국 영화 감독 오손웰스의 기념상이 서 있다. 오손웰스는 그가 감독, 제작, 각본, 주연을 한 ‘시민케인’으로 유명하다. 이런 표식이 있으니 여긴 산책로의 출구가 아니라 입구겠지, 내가 출구에서 반대로 산책한 것이고….
어쨌거나 기념상 맞은편엔 투우장이 있다. 투우 경기가 열리기 전날이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밖에서 들여다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시내 관광을 위한 마차도 있다.
론다는 누에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로 주로 식당거리다. 다리 건너 바로 왼편에는 아데우엘라 전망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푸른 벌판과 옹기종기 작은 집이 모여 있는 풍경은 그림 같다. 우리네 여느 시골 마을 같지만, 절벽 아래 협곡을 끼고 있어 이국적이다. 한 번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공사 중이라 내려가는 길이 막혔다. 하필 내가 왔을 때 공사라니…. 이곳에서 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전원주택으로 활용하라면 참 좋을 듯하다. 전망대 맞은편 깎아지른 절벽 위 흰색으로 칠한 4~5층 정도 높이의 집들은 정겨워 보인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 시간이 꽤 흘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신시가지로 발길을 돌린다. 신시가지 입구 광장에선 헤라클레스가 ‘어서 오라.’고 반긴다. 안달루시아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와 두 기둥. 안쪽은 쇼핑거리다.
우리나라에 단군 할아버지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에르끌레스 영웅이 있다. 헤라클레스의 스페인 발음이다.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질투로 12가지의 모험을 하는데, 이 중 10번째 '게리온의 황소떼 데려오기' 사역을 한 곳이 바로 스페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는 지중해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은 땅끝으로 통했다. 헤라클레스는 바람둥이 제우스와 미케네 3대 왕 엘렉트리온의 맏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다. 제우스는 아내 헤라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헤라의 영광’이란 뜻의 헤라클레스라 이름 짓는다. 문제의 발단은 제우스가, 헤라클레스가 태어난 날을 그리스의 왕이 탄생하는 날로 택일한 것. 아니, 애초에 바람을 피운 것 자체부터 시작일 터이다. 아무튼 이를 알아차린 당시 임신 7개월의 헤라는 급한 마음에 칠삭둥이 아들을 낳는다. 그날 헤라클레스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후에 그리스 왕이 되는 에우리스테우스. 이후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끊임없는 저주를 내린다. 생후 8개월에 독사 두 마리를 보내 암살을 시도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들을 꽉 쥐어 목을 졸라 죽인다. 제우스의 아들이니 식은 죽 먹기다. 그렇다고 저주를 멈출 헤라가 아니다. 술에 취해 있을 때 정신을 멀게 해 그의 아내와 아이를 괴물로 인식하고 자기 손으로 죽이게 만든다. 술에 깨어 자신의 만행을 알게 된 헤라클레스는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는다. 에우리스테우스 왕을 섬기라는 것. 이마저도 헤라의 계략이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바로 12개의 미션이다. 네메아의 사자 죽이기, 레르나의 독사 히드라 죽이기, 케리네이아의 사슴 잡아 오기,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생포하기,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하기, 스팀팔로스의 새 물리치기, 크레타의 황소 잡아 오기, 디오데메스의 야생마 데려오기, 헤폴리테의 허리띠 훔쳐 오기, 게리온의 황소 떼 데려오기, 헤스페라데스의 사과 따오기, 케르베로스의 개 잡아 오기.
이 중 10번째 게리온의 황소 떼 데려오기가 스페인에서 이뤄진다. 게리온은 땅끝 에리테리온섬에 사는 괴물이다. 몸이 세 개, 머리도 세 개로 무시무시한 형상이다. 혼자도 아니다. 머리 둘의 애완견 오르토스, 거인목동 에우리티온을 거느리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에서 지중해 서쪽 끝까지 여러 신의 시험을 견디고, 때로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모험을 이어간다. 마지막 관문은 지중해 끝을 가로막은 아틀라스산맥. 하지만 단번에 둘로 쪼개고 에리테리온섬에 도착해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황소 떼를 몰고 온다. 아틀라스산맥을 쪼개 바다를 낸 자리가 바로 지브롤터해협이다. 그래서 해협의 양옆 절벽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부른다.
스페인 국기는 방패 무늬다. 양옆 기둥 두 개(PLVS/VLTRA)가 있다. 기둥에 새겨진 문자는 스페인의 첫 통일왕국 황제 카를로스 1세의 좌우명 ‘더 넓은 세계로(PLUS ULTRA)’를 뜻하는 라틴어다. 드높은 용기로 지중해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향했던 헤라클레스의 기개를 본받겠다는 의미다. 이곳 안달루시아의 깃발에도 양쪽에 사자를 거느린 헤라클레스가 기둥을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에리테리온 섬은 지금의 세비야다. 세비야는 섬이 아닌데 과거 스페인 지도를 보면 세비야 앞에 호수가 있었다. 그래서 대서양에서 보면 섬처럼 보인다. 결국 헤라클레스는 세비야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세비야 시청사뿐만 아니라 공원에도 헤라클레스 기둥 서 있다.
이는 현실에 근거한 영웅담이다. 뛰어난 용기와 지혜로 이베리아로 진출해 타르테소스 왕국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페니키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고 신격화된 페니키아 상인 멜카르트의 이야기다.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그리스인이 헤라클레스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다.
헤라클레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난 후 여기저기서 기념품을 둘러보다 보니, 이제 날도 제법 어두워지고, 배에서는 종소리가 울린다. 론다의 맛집을 검색하니, ‘푸에르타 그란데’가 유명하다. 투우경기장이 있는 론다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소꼬리찜과 문어구이, 새우감바스, 생선구이 등을 주문한다. 요리사 아저씨, 동양인을 좋아하는 듯 스마트폰을 달라더니,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단체 사진도 찍어주고, 생선 직화요리도 직접 보여준다. 맛은 그닥, 너무 짜다. 스페인에선 고기 요리를 주문할 때 소금을 적게 넣어달라고 특별 주문을 해야 한다더니…. 야외 테라스에서 샹그리에 잔도 함께 기울이니, 나름 낭만적이긴 하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 다시 구도심으로 가본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다는 주택을 찾아보기 위해. 하지만 주택이 있을 법한 곳에 표지판이 없다.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이 녀석들 헤밍웨이를 모른다는 몸짓이다. 스페인어를 좀 배워올걸 그랬나? 몸도 피곤하고, 더 이상 찾아다닐 수 없어 숙소로 돌아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미국 일리노이주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캔자스시티 스타’의 수습기자로 일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적십자 부대의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을 경험한다. 휴전 후 ‘토론토 스타’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한다. 이후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전쟁을 취재하고, “전쟁이야말로 작가가 작품을 쓰는 데 가장 좋은 소재”라며 소설 창작에 전념한다. 전후 세대의 모습을 그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로 이름을 알리고, ‘무기여 잘 있어라’(1929)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파를 지원하고 특파원 자격으로 직접 취재에 나선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발표한 ‘노인과 바다’(1952)로 이듬해 퓰리처상, 1954년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쥔다. 망망대해에서 노인이 사투를 통해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실존철학을 담아낸 명작이다. 말년에 우울증,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리다 1961년 7월 아이다호주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으로 삶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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