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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의 해외여행

샛강의 일본 규슈 가족여행, 규슈의 문화와 역사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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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19.

 

결혼 11주년 기념 일본 가족여행4

 

여행 마지막 날, 벳푸에서의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 채 오이타공항으로 발길을 돌린다.

세 가족이 3일 동안을 구순하게 보냈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지만 함께 따라오는 피로까지 물리칠 순 없다. 피로도 피로지

, 여행 끝자락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는 생각에선지, 모두들 개맹이 없는 얼굴이다. 차 키를 잠시 잃었다가 찾은 일 하며, 경찰차를 타본 일 하며, 비 맞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일 하며, 짧은 기간 곡절도 많았다. 그 만큼 추억도 가슴에 듬뿍 쌓았다. 큰 사고 없이 여행을 마쳤다는 것에 마음만은 홀가분하다. 세 가족의 일본 오이타여행은 이렇게 끝.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찾아오길.......

 

규슈는 역사적으로 일본 최초의 문명을 꽃피운 역사의 요람이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문화의 창 역할을 하기도 한

. 우리 한반도, 중국대륙과 인접해 역사시대 초기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요, 쇄국정책을 편 막부시대엔 유일하게 나가사키항을 개항해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새끼 모양 무늬인 조몬 토기를 사용하는 조몬 문화를 일군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규슈 북쪽을 중심으로 철기문화가 움튼다. 원시적 국가 형태를 갖춘 야요이 문화(기원전 3세기~기원후 4세기) 시대다. 규슈에서 시작해 혼슈로 전파된다. 한반도의 삼한이 전해준 벼농사로 농경과 정주생활이 시작돼 일본문화의 원점을 이룬 대사건이다. 규슈 북쪽 사가현의 요시노가리(吉野)’ 유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요시노가리는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1천여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요이 시대 일본 최대 규모의 유적이다. 촌락의 가장자리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책으로 둘러쳐져있다. 적의 침입을 관찰하는 망루 모노미야구라도 세워져 있다. 창고도 다양하다. 2천기 이상의 가메칸(항아리 관)’이 매장된 무덤도 있다. 집단부락 북쪽의 분릉묘전시관에는 동서로 26미터, 남북으로 49미터나 되는 일본 최대 분릉묘가 발굴돼 전시되고 있다. 3세기 중국의 사서 귀사왜인전에 여왕 히미코가 통치했다고 기록된 야마타이국과 매우 비슷해 일본의 시작이 기타큐슈였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야요이는 이처럼 한반도 남부 고대인의 영향을 받은 문화다. 한반도에서 세력다툼에서 밀린 무리가 규슈로 건너갔을 것이

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이 시대부터 일본인은 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가야의 뒤를 이어 신라와 백제도 일본 고대 문화의 두 가지 줄기를 이룬다. 하나는 시마네현 이즈모(出雲)로 들어와 야마토 문화를 이룬 신라계다. 10대 스진(崇神) 천황은 신라계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북규슈에서 오사카로 진출한 백제계다. 15대와 16대 오진(應神), 닌토쿠(仁德) 천황이 백제계다. 이들 부자 때 가와치 왕조가 번성하게 된다. 백제계 최초의 천황인 오진 천황 때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한 역사 기록이 있다.

 

칠지도는 혼슈지역 나라현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된 철제 칼이다. 칼의 몸 양 옆으로 가지칼이 일정한 간격으로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이 있다. 단군신화의 신단수처럼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

 

칼의 녹을 닦아내다 양면에 금으로 상감된 60여 글자가 발견돼 이름이 칠지도 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근초고왕이 오진 천황에게 하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명문을 해석하면 태화(泰和) 4(근초고왕 24369) 5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눠 마땅하다. 선세(先世) 이래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해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라는 내용이다. 백제의 우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백제왕의 말을 성상의 말씀이라 표현하고, 왜왕에게는 존칭이 없으며, 명령형으로 끝맺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을 주는 것은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 성격이 강하다. 칠지도 하사는 왜왕에게 일본열도에서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두 나라의 종주·신속 관계가 드러난 것이다.

 

규슈 사가현의 작은 섬 가카라시마는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다. 일본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생모가 남편과 함께 왕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무령왕의 생부는 생모의 남편이 아닌 왕이라는 기록도 있다. 현재 가카라시마에서는 매년 무령왕 축제가 열린다.

 

6세기 첫 번째 국가인 야마토 정권의 위치가 규슈냐, 혼슈 서남부냐를 두고 역사학자들이 대립할 정도로 규슈는 일본 고대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 야마토 정권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513 5경박사가 파견돼 유교를 전하고, 554년 천문학자 왕보손을 비롯한 의학, 약학, 역학 전문가들이 건너간다. 고급 기술인력의 30가 한반도 남부 출신이다.

 

백제계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왕인 박사. 오진 천황을 천거한 인물도 왕인 박사다. 사가현 요시노가리(吉野유적에서 1km 떨어진 간자키시의 왕인신사에는 왕인천만궁(王仁天満宮)’이라는 비석이 있다. 신사는 일본의 토속종교 시설이니, 왕인 박사가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대단한 인물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왕인 박사가 일본 응신 천황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갈 때 한단야공(韓鍛治工오복사(吳服師양주자(釀酒者도기공(陶器工)  45명이 함께 간다. 이들은 각 분야의 전문 기술을 전수해 일본 고대산업 발전에 기여한다. 특히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가 황실의 사부로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한다.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아스카(飛鳥) 문화의 시조가 된다. 왕인은 어느 분야에도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기에 일본 문화사상 성인처럼 신격화된다. 오사카부에 있는 왕인묘는 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중간 지점인 히라카카에 왕인 박사의 묘가 있다. 도쿄 한복판인 우에노 공원에도 10척이 넘는 왕인 박사의 공덕비가 있다.

 

그러나 규슈는 고대 이후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본토인들은 규슈인들을 남만(南蠻)이라 부르면서 차별할 정도였다.

 

그러다 13세기 원나라의 침략을 받지만 섬나라 특성 때문에 잘 지켜낸다. 1281년 하카타 만에서 이른바 가미카제(神風 신의 바람)’가 불어 원나라 함대를 침몰시키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것.

 

가미카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규슈지역에 포함돼 있는 오키나와(沖繩)에서 미국 해군 5천여 명을 전사시킨 자살 공격이다. 가미카제 비행기는 대부분 일반 전투기나 경폭격기였다. 1톤이 넘는 폭약과 여분의 연료 탱크를 싣고 목표물에 충돌하는 수법이다. 가미카제 공격은 2차 세계대전 때 34척의 전함을 침몰시키고 수백 척에 손상을 입혔다.

 

1400년께에는 구마모토 일대의 성을 개축해 구마모토성(本熊城)이 완성된다.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의 일본 성 외관이 하얀색인 것과 달리 검은 색이다. 현재의 모습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성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혈연관계가 있고 전쟁에도 참전했다. 당시 식량 확보를 위해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은행나무성(銀杏城 긴난조)이라 불리기도 한다.

 

규슈는 근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면서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뼈아픈 기억의 장소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서, 조선과 명의 추격을 막고 일본군의 철수를 이끈 시마즈 가문은 규슈의 유력한 세력이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가현에 나고야성을 세운 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쟁을 지휘했다.

 

임진왜란을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 도공을 잡아들여라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자기가 단순한 예술품을 넘어 집 한 채와 맞먹는 수준의 값비싼 재산이었다. 일본 각지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현지 토양과 조건에 따라 특색있는 자기를 만든다. 규슈에도 여러 전문화된 가마가 생긴다.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하기지방은 조선 도공의 후손인 이작광, 이경 형제가 조선의 막사발 모양을 한 찻잔을 만들어 명성을 얻는다. 이 도자기를 하기야키라 부른다. 그 중 조선의 막사발 모양을 한 찻잔을 이도다완이라 부른다고향땅을 그리며 한탄하는 한글이 적힌 것이 있다. ‘개야 짖지 마라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조목지 호고구려님이 계신 곳에 다녀오겠노라그 개도 호고구려 개로구나듣고 잠잠하노라’. 조목지는 인명이나 지명일 것이다호고구려는 일본인이 말하는 오랑케 조선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감추고 다이묘(봉건 제후)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다도를 활용한다. 그의 다도 스승이자 정치적 조언자는 승려 센리큐. 센리큐는 일본의 차 문화를 만든 사람이다. 소박함과 간소함을 중히 여긴다. 이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막사발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일본에서 조선 막사발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다.

 

규슈 사가현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이삼평이 일본 최초의 백자를 빚은 곳이다. 백자는 색을 내기 가장 어려운 도자기여서 일본인 도공은 감히 빚지 못했다. 이삼평이 아리타의 이즈미 산에서 백자를 빚을 수 있는 흙을 발견해 백자를 구워낸다. 이 때문에 아리타 자기는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다. 이때문에 아리타에 이삼평을 도자기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세워진다. 이곳에서는 매년 이삼평 축제가 열린다. 아리타는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가카라시마 옆에 있는 도시다.

 

이처럼 사가현에는 교류와 약탈의 흔적이 공존한다. 때문에 가라쓰시에 있는 나고야성(名護屋박물관은 임진왜란을 잘못된 침략으로 규정한다. 과거 우호적이었던 한일 교류 역사를 중심으로 나고야성 이전, 역사 속의 나고야성, 나고야성 이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인 도공들이 빚은 화려한 도자기를 전 세계에 수출한다. 유럽의 반응은 뜨거웠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를 바탕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이라는 서구식 근대화를 이룬다. 조선의 도공을 납치해가 훗날 한반도를 침략하는 기반을 닦은 셈이다. 조선인 도공들의 쓸쓸한 운명과, 도자기 하나로 두 나라의 운명이 바뀐 역사적 역설의 한 장면이다.

 

17세기 초 도요토미 정권 붕괴 후 정국의 혼란을 수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는 쇄국정책기다. 하지만 나가사키에 난반 무역항을 유일하게 개항해 조선, 중국과 교역한다. 네덜란드 등 유럽으로부터 선진문물도 받아들인다.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와 국교를 정상화하고 조선통신사를 파견, 1811년까지 총 12차례의 교류활동을 펼친다.

이처럼 규슈는 일본의 역사시대를 열었고, 때로는 본토로부터 무시당하는 외딴 곳이기도 했고, 때로는 국제사회와 교역의 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규슈인들은 변화를 잘 포착하고, 선도하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 제도 개혁에 많은 규슈 출신이 중심 역할을 했다.

 

1877년 메이지유신 당시 천황 복고에 반대하는 봉건 귀족, 사무라이들이 55일간 구마모토성에서 항전하며 난공불락의 성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인 모를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타면서 정부군에 패하고 만다. 1960년 대부분 재건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5년 혼슈의 관문 역할을 하는 기타큐슈시가 당초 원폭 투하 목표지였다. 작전 당일인 8 9일 기타큐슈에 구름이 많이 끼는 바람에 목표지가 바뀌어 나가사키에 투하된다. 이에 앞선 8 6일 히로시마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일반인 학살에 쓰인 원자폭탄이다.

 

규슈는 현재도 우리나라, 중국, 동남아시아와의 무역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특히나 전라남도와 거리상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서 교류가 활발하다. 현재 무안국제공항에서 기타큐슈공항과 오이타공항 간 2개 직항편이 운항되고 있다. 사가현은 1992년 한일해협연안 지사회의를 계기로 전라남도와 공무원 상호 파견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지난 2011년 우호교류 협정을 체결했고 2019년 자매결연을 예정하고 있다. 후쿠오카현, 나가사키현과도 1992년부터 우호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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