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1.
실제 여행 첫 날, 아침 일찍 섬 투어를 위해 선착장이 있는 ‘제셀턴 포인트’로 향한다. 코타키나발루 인근 섬을 연결해주는 여객터미널이어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입구에 제셀턴 포인트임을 알리는 커다란 아치문이 있어 사진에 담아본다. 아치문을 통과하면 광장과 함께 왼편에는 코타키나발루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오래된 사진들이 벽을 따라 붙어 있다. 오른편에는 기념품점, 식당, 커피숍, 열대과일 상점 등이 있다. 이곳 제셀턴 포인트는 말레이시아가 오랜 기간 식민지 시대를 거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국의 수탈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100년 넘은 목조건물들이 그렇고, 통나무로 이뤄진 선착장 시설이 그렇다. 영국인이 쓰던 빨간 공중전화박스도 왼편 사진이 붙어 있는 곳에 아직 남아 있다.
제셀턴은 말레이시아 식민 지배를 위해 영국 해군이 최초로 상륙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셀턴 영국 제독이 이곳을 통해 말레이시아를 점령한다. 제셀턴 포인트는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국인들은 이곳에 항구도시를 건설한다. 말레이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반출해가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고, 공사를 하고, 급료를 주고…. 광장을 따라 놓인 기찻길이 수탈의 대표적 흔적이다. 영국인들은 이 기찻
길을 만들어 말레이시아 곳곳으로 갈 수 있었고, 반대로 말레이시아의 천연자원이 이 길을 통해 빠져나갔다.
1963년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코타키나발루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항구는 예전 이름인 제셀턴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항구 주변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요트와 보트들이 즐비해 휴양지 느낌을 물씬 풍긴다.
구명조끼를 입고 세팡가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흔연히 올라탄다. 구명조끼는 필수다. 바로 며칠 전 헝가리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좌초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나. 그들이 구명조끼를 착용했더라면...... 그 사고 소식을 접하고, ‘코타키나발루 여행 일정을 소화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뭐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겠어?’ 하는 안이한(?) 생각과, 배 타는 것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구명조끼를 입었으니, 괜찮겠지.
배로 15분여를 달려 툰구 압둘라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5개의 섬 바로 옆에 있는 세팡가르섬으로 접안한다. 쪽빛 바다가 아름답다. 물안경을 쓰고 바다 속 물고기를 볼 수 있는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가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크기도 피라미 수준이어서 아이들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백사장 모
래가 부드럽다. 물도 깨끗한 편이다. 게다가 한적하기까지 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기기엔 제격이다. 뙤약볕 아래서 한나절을 보내기엔 좀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적도 부근이어선지 바닷물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짭짜름하다. 한참을 노닐다가 우연찮게 백사장에 있는 패들보드 하나를 발견한다. 한동안 주의 깊게 봤는데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원주민이 두고 간 것이 아닌가 하고, 타 보기로 한다. 아이들이 올라타서 엎드려 흔들흔들 하기도 하고, 일어서서 노를 저어보기도 한다. 다이빙도 한다. 그럴라치면 뒤집히기 일쑤다. 나래나 시현이, 상아 등 큰 애들은 호숩다며 좋아한다. 한결이와 승우, 작은 애들은 뒤집지 말라고, 흔들지도 말라고, 우는 시늉을 한다. 사내 녀석들이 나원참.
한참을 패들보드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이번에는 원주민이 카약을 몰고 와 백사장으로 끌고 올라가는 게 눈에 띈다. 순간, 용기가 발동해 손짓 발짓 해가며 타봐도 되냐고 묻는다. 고맙게도 괜찮다는 반응이다. “뜨리마까시~”를 연발하며 아이
들을 태우고 노를 저어 속이 안 비치는 검푸른 바다까지 나가 본다. 노 젓는 것이 익숙지 않은데다 파도가 제법 세 방향 전환이 잘 안된다. 구명조끼를 입긴 했지만, 겁이 덜컥 난다. 순간 다뉴브강을 비롯해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열심히 쪽빛 해안쪽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노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아니 노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겠지. 뒤에 탄 아이들에겐 속내를 들킬까봐 “재밌지?” 한다.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 녀석들이 재밌다고 좌우로 몸을 흔들흔들 한다. 작은 녀석들은 또 흔들지 말라고 떼쓰는데... 한참을 용을 쓴 끝에 포도시 속이 비치는 얕은 바다로 돌아온다. 패들보드와 카약으로 세 가족이 한참을 재미지게 논다. 어느새 뱃속 시계가 꼬르륵 꼬르륵 점심시간을 알려준다. 화장실 옆 야외 샤워장에서 바닷물을 씻어내고, 짐을 풀어뒀던 식탁으로 돌아간다.
산기슭에 마련된 뷔페식 오션뷰 식당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는 구조다. 태평양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이곳 세팡가르섬은 코나키나발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섬 투어 장소인 인근 툰쿠 압둘라만 해양 국립공원에 비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한적하다더니, 금세 소문이 퍼졌나보다. 점심 때가 되니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몰려와 어수선하다. 가이드 말이 정각 12시에 식당이 개시하면 맛있는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 줄이 길게 늘어서 박작거릴 것이란다. 인기있는 음식은 바닥이 날 수도 있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개시 5분여 전부터 식당 주변에서 눈치를 보며 줄 설 준비를 한다. 옆에 있던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개판 5분 전
(開版 五分前)’ 상황이다. 개판 5분 전은 한국전쟁 시절 피난길에서 나온 말이다. 피난민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 밥을 지어 제공했었는데 밥을 나눠주기 전에 사람들에게 통보하는 말이었다. 밥이 거의 다 돼 솥단지를 5분 후에 열겠다고 알리면 몹시 굶주린 상태에서 서로 배식을 먼저 받으려고 난장판을 이룬 것에서 비롯됐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개판 5분 전’ 상황을 잠시 상상하며, 아이들이 기다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이윽고 12시다. 역시나 중국인 관광객들이 다락같이 몰려들어 시끌벅적하다. 듣던 바대로 만큼 먹잘 것이 많지는 않다. 애들이나 어른이나 바비큐 치킨과, 꽃게찜, 새우찜 정도가 먹을 만하다.
호기심에 열대과일을 담아왔지만 맛을 보니 그닥 먹고 싶은 생각은 안든다. 대충 배를 채운 후 입가심으로 야자수 통주스를 산다.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여들어 빨대를 꽂더니 모두 실망섞인 얼굴들이다. 작은 사내녀석 둘이서만 호기심에선지, 먹을만한지 홀짝홀짝 빨아댈 뿐이다.
동남아시아 섬 투어 가운데 이곳 코타키나발루가 가장 인기가 많단다. 사바주정부가 수질 관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섬이 개인 소유여서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것도 물이 깨끗한 한 이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섬은 ‘사피
+마무틱’. 하지만 한적함을 원한다면 ‘세팡가르섬’이 그래도 아직까지는 좋은 것같다. 맑고 깨끗한데 멀어도 상관 없다면 ‘만따나니섬’으로 가면 된다.
이들 섬에서는 스노클링 이외에도 보트가 끄는 낙하산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패러세일링,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며 서서 노를 젓는 패들보드, 인어가 되어본 듯한 다이빙, 제트스키나 바나나보트 등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추가요금을 내고 즐길 수 있다. 아이들 패러세일링을 태워주고 싶었는데, 무서워 보이는 지 다들 싫대서 다른 사람들 타는 것 구경만 하고 온다. 주머니를 아꼈으니, 효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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