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0.
말이 통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나를 담아보고, 나를 기록하는 일, 해외여행을 즐기는 재미다. 여행은 다른 고장이나 나라에 가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눈으로 담아오고, 그곳 사람들의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보며, 입맛에
맞지 않아도 그곳 음식을 맛보는 과정이다. 걸어서 다니기도 하고, 자전거나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 등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여가시간의 즐거움을 위함이요,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함이요, 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 해소를 위함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사전에 인터넷으로 여행정보를 갈무리하는 것도 재미지다. 어디를 여행하든 아는 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
일정한 목적지 없이 몸 가는 대로 돌아다니는 방랑과 달리, 여행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에 따라 크게 관광과, 휴양으로 나눌 수 있다. 관광의 어원은 중국 주나라 시절 ‘역경’의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 구절에서 비롯됐다. ‘한 나라의 사절이 다른 나라에 가, 자기 나라 문물을 소개하고, 그 나라의 문물을 살피면서, 그 나라 왕으로부터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다. 움직임의 목적과 장소를 중요시하는 현재의 관광 개념에 의전(儀典) 개념이 더해진 것. 반면 휴양은 편히 쉬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여행이다. 큰 돈 들여 맘 먹고 시간 내서 나서는 여행이기에 과거엔 고생을 자처하면서까지 많은 것을 보려고 발이 닳도록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요샌 푹 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휴양 여행이 대세다.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으면 먹고, 돌아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는 여유 있는 여행을 통해 시간의 가치를 만끽할 수 있다. 자유여행의 천국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에 나래․한결, 상아․승우, 시현이네, 의초로운 세 가족의 시간을 맡겨 본다.
무안에서 비행기로 약 5시간. 한국과의 시차는 1시간. 동남아시아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잘 보존된 나라인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로 떠난다. 적도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 남중국해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있는 곳이다. 특히나 코타키나발루는 밀림과 열대섬이 잘 조화를 이룬 곳으로 유명하다. 1899년 건설된 항구도시다. 목재와 천연고무 등을 추출하기에 적합한 보르네오섬의 북부에 위치해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다. 사바주의 최대 도시이자, 느린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인 휴양지다. 우리처럼 초딩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여행하기에 딱이다. 무안에서도 직항로가 있어 쉬이 갈 수 있는 휴양지지만 아직 여행객들로 붐비진 않은 편이다.
가까운 곳에 국제공항이 있어 좋다. 무안국제공항, 자가용으로 20분 거리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40여 분이나 여유 있게 출발한다. 고속도로 2차선 중 한 개 차선이 공사 중이어선지 차량이 느릿느릿, 거북이도 이보다는 빠를 정도다. 아무리 공사 중이라지만 이런 적은 없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마도 사고가 났지 싶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비행기 티켓팅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왜 이럴까, 나는 애가 타는데, 조금만 더 가보자. 더 가다 보면 뚫리겠지. 초조한 마음에 별의별 생각이 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20여 분 먼저 간 일행이 고속도로 막히니 국도로 가라는 충고를 했건만. 이렇게나 많이 막힐 줄 알았다면 국도로 갈걸. 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엔 늦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여행사에서 왜 이렇게 안 오냐는 독촉 전화인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도 앞서간 일행들이다. 공항 가는 길로 갈아타는 지점에 가서야 길이 뚫린다며 국도로 오고 있냐고 묻는다. 고속도로에서 꼼짝 못하고 있댔더니 ‘큰일이네’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안전운전 하란다. 조금 뒤 또다시 벨소리가 울린다. 아뿔싸 여행사 직원이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느냐는데... 차가 막혀서 조금 늦을 것같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끊고는, 멍 때리며 운전대를 무겁게 쥔다. 급한 마음에 앞 차량 꽁무니에 바투 대본다. 그런다고 앞 차가 빨리 빠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스레 아내와 아이들에게 조심하라는 핀잔만 들을 뿐. 다행히도 앞서간 일행보다 좀 더 빠른 곳에서 길이 뚫린다.
예정 시간보다 10여 분 늦었다. 그나마 주차장 빈 자리가 많아 다행이다. 무안공항 이용자의 특권이다. 최근 국제선이 부쩍 늘어나면서 다소 이용객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길게 줄이 늘어설 만큼은 아니다. 티케팅을 하고는 여유있게 세 가족이 모여 도시락 저녁을 먹는다. 어스름 녘에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5시간여를 날아간 곳은 코타키나발루국제공항. 무안공항만큼이나 작아 보이지만, 국제관광지이다 보니 밤늦은 시간인데도 입국장이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다. 입국카드를 쓰지 않아도 돼 좋았는데, 지문날인을 하라니, 얼굴이 이지러질 정도로 거시기하다.
알아두면 현지인들과 가벼운 인사를 하며 여행의 재미를 더할 수 있는 말레이어로 ‘안녕하세요’는 ‘아빠까바르’, ‘감사합니다’는 ‘뜨리마까시’, ‘천만에요’는 ‘싸마싸마’ 등이 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반도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와 보르네오섬 북서부의 동말레이시아, 두 지역으로 이뤄졌다. 서말레이시아는 북쪽 타이, 남쪽 싱가포르, 서쪽 말라카해협, 동쪽 남중국해를 경계로 하며 11개 주로 구성됐다. 동말레이시아는 북서쪽 남중국해, 동쪽 셀레베스해, 남쪽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섬과 경계를 이루고, 사바주와 사라와크주가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1.5배다. 말레이인과 중국인이 주요 인종이고, 말라카해협이 세계 주요 항로 역할을 하고 있어 여러 부족의 토착민과 남아시아계 다양한 소수 인종이 있다. 말레이계와 중국계 간 경쟁의식이 치열하다. 말레이계는 정치 분야에서, 중국계는 경제 분야에서 각각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슬람국가다. 이슬람이 전해진 때는 15세기 인도네시아계 말라카 왕국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말라카해협에서 활발한 무역을 벌이던 아랍 상인이 전파했다. 이슬람교가 국교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특히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중국계는 불교와 도교, 인도계는 힌두교를 믿는 전통이 강하다.
이슬람문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라마단’. 2019년 올해 말레이시아의 라마단 기간은 지난 5월 6일부터 시작해 6월 4일까지 한 달간이다. 라마단 막바지에 이곳 코타키나발루에 왔지만, 현지 이슬람인과 마주할 일이 없어 딱히 라마단 기간이란 실감은 나지 않는다. 아랍어로 ‘무더운 달’을 의미하는 라마단은 금식 기간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과 물을 입에 대지 않는다. 금식 외에도 흡연, 부정적인 생각, 남을 헐뜯는 행위, 음악을 듣는 행위, TV를 보는 행위 등 일체의 욕구행위가 금지된다. 다만 병자나 임산부, 모유 수유 중인 산모, 어린이, 외국인 등은 금욕 의무에서 벗어난다. 이 기간에도 해가 진 후인 저녁 7시 20분께부터 다음날 해가 뜨기 전인 아침 5시 50분께까지는 푸짐한 ‘할랄(Halal)’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슬람인들은 새벽에 일어나 음식을 먹은 후 배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부쳤다가 오전 9시가 다 돼서야 직장에 출근한다. 오후에는 5시께 미리 나가서 밥을 사서 사무실에 왔다가 6시가 넘어도 퇴근하지 않고 기다린 후 해가 지면 먹고 힘내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라마단 동안의 금식은 알라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거지의 마음을 느껴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렇기에 고통이 아닌 하나의 축제로 치러진다.
라마단이 끝나자마자 6월 5일 최고의 명절인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Hari Raya Aidilfitri)’가 이어진다. ‘마음껏 먹고 즐기는 축제’다. ‘라마단’ 기간 동안 즐기지 못한 온갖 음식을 곳곳에서 무료로 나눠준다. 오픈하우스 행사를 통해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척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음식 나눔 축제를 즐긴다. 초대 대상은 무슬림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종교와 인종을 초월해 말레이시아인, 세계 각국 여행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잔치 분위기’다. 옛 사바주청사 앞 광장에서도 축제가 열린단다.
이슬람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일부다처제다. 남자들의 천국인가? 돈만 많으면 이곳 말레이시아에서는 최대 4명까지 처를 둘 수 있다. 첫째 부인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보통은 큰 무리 없이 허락을 해준다. 왜일까? ‘엔젤’이라 칭하는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이 생기는 순간부터 모든 집안일에서 열외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집안일은 둘째, 셋째, 넷째 부인이 나눠서 한다. 집안일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남편은 4명의 부인에게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한다. 선물을 하더라도 똑같은 것으로 4명 모두에게 줘야 하고,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슬람의 남성들은 명이 짧단다. 남자들의 천국이 아닌 듯 싶다. 역시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좋다, 아니다를 따질 게 아니라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순수하다. 나라의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야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1시간 거리에 있는 이웃나라의 갱단이 많이 와 있단다. 양원제를 운영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국가원수는 국왕, 정부수반은 총리다. 화폐 단위는 링깃이다. 1링깃이 300원 정도다. 수도는 서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다. 쿠알라는 강, 룸푸르는 만나다라는 뜻으로 클랑강과 곰박강, 두개의 흙탕물로 이뤄진 강이 만나는 곳을 뜻한다. 기후는 적도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우림. 기온과 습도가 높다. 다만 코타키나발루가 있는 동말레이시아는 서말레이시아에 비해 기온과 습도가 낮은 편이다. 하루에 2~3번씩 확 내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사이로 햇볕이 이글거리는 스콜성 비가 쏟아진다. 더위를 식혀주니 오히려 반가운 비다. 열대우림이어서 원시동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도로에는 차량이 생각보다 많다. 코타키나발루에 40만 명의 인구가 사는데, 한 가구에 보통 차량 3대씩은 가지고 있단다. 그렇다고 자동차 가격이 싼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K5’가 보통 4천만 원을 넘어갈 정도다. 기술력이 낮은 자국의 자동차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차에 높은 관세를 붙이기 때문이다. 큰 SUV차는 보통 6천만 원 이상이다. 이런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은 보통 말레이계다. 말레이계 순수 혈통을 우대하는 ‘부미푸트라 정책(Bumiputra policy)’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부미푸트라 정책’은 1969년 5월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계와 말레이계 간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비롯됐다. 커피와 고무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는 이 때문에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일본, 다시 영국으로부터 오랜 식민지 수탈을 당한다.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이미 경제를 장악한 상태였
다. 제국이 식민지 수탈 당시 상대적으로 부지런한 중국 노동자들을 더 많이 고용했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에서 온 노동자들은 경제 관념이 확실한 사람들이어서 이곳에 정착해 부를 축적했다. 당시 인구의 9%를 차지하던 인도계 이민자 역시 상당수가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정작 원주민으로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말레이계는 가난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독립국가가 탄생하면서 말레이인들은 중국계를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할 것을 바란다. 정부 입장에선 뾰족한 수가 없어 골치가 아프다. 결국 정부는 술탄에게 충성하겠다는 맹세 서약을 받고 중국계를 국민으로 받아준다. 중국계가 이미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옹호하는 정당이 계속 총리를 배출하면서 말레이계의 반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1969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말레이계에 불리한 선거 결과가 나온다. 고무된 중국계 정당들이 말레이계 빈민가에서 축하 퍼레이드를 하면서 말레이계 주민들의 분노를 산다. 결국 폭동이 일어나 중국계 730여 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책임을 지고 툰구 압둘 라만 총리가 사퇴한다. 이듬해 집권한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가 말레이계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놓은 것이 ‘부미푸트라 정책’이다.
유혈사태의 근본 원인이 소득 불균형과 사회적 지위 차이에 있다고 보고 말레이계 우대를 통해 빈부 격차를 줄이기로 한 것이다. 말레이어로 ‘땅의 주인’이라는 뜻의 이 정책으로 기업체에 말레이계 지분 30% 이상을 보장토록 하고, 대학교 정원의 80%를 말레이계로 우선 뽑도록 하고 있다. 자동차도 말레이계는 15년 전액 할부로 살 수 있다. 할부 이자도 중국계는 3.72% 정도인 반면, 말레이계는 1.22% 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말레이계는 가난해도 고가의 차를 2~3대씩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레이계가 주택을 구입할 때도 무려 50년이나 할부를 해준다. 정치권과 공직에도 말레이계가 압도적으로 많다. 중국계는 공무원이 돼도 평생 진급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요즘 전체 국부 가운데 말레이계의 비중이 30%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여전히 경제는 중국계가 잡고 있는 셈이다. 말레이계는 혈통끼리만 결혼하는 풍속이 있어 ‘부미푸트라 정책’이 장기간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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