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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의 해외여행

샛강의 스페인 여행. 헤라클레스의 나라 톺아보기, 바르셀로나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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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기 1
 
똑똑해 보이고 싶고, 주변 관심을 끌고 싶고, 오래도록 남의 기억에 남고도 싶은 ‘순전한 이기심!’. 글을 쓰는 이유다. ‘관종’이라고 놀려도 좋다. 스탈린 시대 특권층을 풍자한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도 글 쓰는 이유 중 하나로 꼽지 않았던가. 나를 드러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순전한 이기심에 빠져, 고대 지중해 시대 유럽의 변방에서 출발해 대항해시대 무적함대를 자랑하며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의 옛 영광과, 도시재생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현재의 모습을 톺아본다.
보고, 듣고, 검색하고, 느낀 것을 짜깁기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나름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만큼 많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칭찬까지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여행한 지 반년이나 지났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글을 마무리한 보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헤라클레스의 나라’ 스페인은 고대 유럽 지구가 평평하다고 여기던 시절, 지중해 서쪽 땅끝의 변방이면서도 대서양 바닷길의 시작점이었다. 이같은 지정학적 위치는 탐험 의식을 불살라 한때는 강한 나라로 융성하고, 왕왕 이민족의 침략으로 고난을 받기도 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고대 로마 점령기엔 로마의 5현제 가운데 2명을 배출할 정도로 속주가 아닌 로마의 일원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슬람의 전성기엔 무려 800년이나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근대 대항해시대를 이끌며 거대 해양 제국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 유대인을 핍박한 대가로 재정이 바닥나 신대륙 발견 후발 주자인 영국과 네덜란드 등에 그 자리를 내주고 사그라든다. 현대에 와서는 도시재생을 통해 이제 다시 문화관광 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역사는 흡사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역사관의 모범 교본처럼 보인다. 태양이 뜨겁고, 플라멩코와 투우를 즐기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으로 훌쩍 떠난다.
 

새벽부터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5시간여를 달려 인천으로 올라간다. 목포에서 인천까지, 그야말로 고속도로 끝에서 끝까지다. 이 정도의 피곤함은 약과.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고난의 길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인천에서 잠시 비행기를 타기 전에 달콤한 시간도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면세점 쇼핑도 즐기면서. 비행기에 올라타면 고행은 다시 이어진다.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1만m 고도에서 시속 800km 안팎의 속도로 무려 14시간이나 날아간다. 영화도 보고, 간간이 나오는 기내식을 맛보고, 음악도 듣고, 또 영화도 보고를 반복하지만, 시계가 고장 났는지, 여전히 남은 시간은 한참이다. 감옥이 따로 없다. 아마도 단테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신곡’의 지옥 편에 비행기 여행을 넣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기회가 생기면 또 갈 거면서ㅋㅋ…. 허리, 엉덩이, 어깨,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주인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인 것은 좌석이 통로 쪽이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풀 수 있다는 것. 이따금씩 스트레칭을 하며 통로를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온몸이 찌뿌듯하다. 잠을 청하면 시간도 빨리 가고 좋으련만 일부러 피한다. 스페인 도착이 밤 시간이어서 시차 적응을 위해, 아니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해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그게 뭐 대수인가. 중국과 몽골 우루무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아제르바이잔 바쿠, 터키 이스탄불, 그리스 테살로니카, 이탈리아 나폴리 등 수많은 도시 상공을 지나서야 바르셀로나 땅을 밟는다.
 
입국장에서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고 공항을 빠져나온다. 빨라서 좋다. 첫 유럽 여행지였던 런던 히스로공항 입국장에서의 기나긴 줄을 떠올리니, ‘스페인에 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인간은 역시 망각의 동물. 그새 힘들었던 여독도 모두 잊어버린다. 스페인에서 제일 먼저 반긴 건 뜻밖에도 비. 여름철 50도까지 오를 만큼 햇살이 따갑고 건조해 좀처럼 비가 오지 않는다더니. 8월 말이라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지만, 여전히 이글거리는 햇빛을 걱정했는데, 비라니 환영이라도 하는 것인가? ‘더위로 고생하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기분이 들뜬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차창 밖 시내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식당이다. 비행기에서 서너 차례 식사와 간식을 먹었는데…. 하루 종일 앉아서 식사만 하다니, 마치 사육되는 기분이다. 스페인에서의 첫 식사니, 그래도 행복하다. 토마토 생과인 듯한 수프로 속을 달래고, ‘피데우아’라는 스파게티로 배를 채운다. 오징어 맛인데, 싹둑싹둑 잘라놓은 면발이 새롭다. 레몬 맛의 ‘클라라 맥주’도 곁들인다.

요기를 때우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눈에 띄는 것은 인도 한쪽을 점령한 거대한 쓰레기통. 스페인 어느 도시를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문화관광의 나라에 언뜻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거리가 깨끗한 이유다. 인도가 넓어서 이렇게 큰 쓰레기통이 한쪽 귀퉁이를 차지해도 길이 좁아 보이질 않는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구도시야 이미 차도도 적고 인도도 적어 안 되겠지만, 남악 신도시같이 새로 개발하는 신시가지는 차도와 인도를 넉넉하고 쾌적하게 꾸미면 좋았을 텐데.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덧 호텔에 도착한다. 무안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다시 이곳 바르셀로나까지 꼬박 24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웠더니, 꿀잠이 스르르 밀려온다. 보통 여행 첫날 저녁에는 일행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상견례를 하기 일쑤인데 모두 피곤했나 보다. 모임은 잠시 내일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오랜만에 떠나온 해외여행에 마음이 들떠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원망하며 전체 일정을 뒤적여 본다. 잠시 스페인 역사도 떠올려 보고 하지만, 잠에는 장사가 없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이 흘러내려 어느새 새곤새곤 잠이 든다. 피곤해서인지 꿈을 꿀 겨를도 없다. 아니, 수많은 꿈을 꾸었는데 생각이 안 나는 것이겠지….
 

인류 최초의 예술작품을 품은 나라 스페인. 지중해와 대서양이 둘러싼 주먹 모양의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해 있다. 반도 동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있다. 3만 6천 년 전 구석기시대 네안데르탈인, 호모사피엔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시조인 크로마뇽인이 1만 4천 년 전에 생생한 벽화를 남긴 것이다. 훼손을 우려해 똑같은 크기의 복제 동굴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동굴 입구가 1만 3천 년 전 산사태로 무너져 훼손되지 않았다. 1879년 인근에 살던 귀족 마르셀리노 산즈 데 사우투올라가 딸과 함께 와서 발견한다. 딸이 “아빠 천장을 봐! 황소야.”라고 외친면서다.
 

이곳 이베리아반도에 현재의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베리아 남부 현재의 우엘바(세비야 옆) 근처 이베로스강 인근에 이베로족이 터를 잡는다. 이베리아의 어원이다. 이들은 대장이 죽으면 아랫사람이 모두 자살할 정도로 강한 충성심을 지닌 민족이다. 아니 이쯤 되면 호전적인 민족이라 해야 할 듯싶다. 기원전 1천 년에는 북유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한 켈트인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반도 서북쪽에 정착한다. 켈트족 역시 용감하고 호전적이다. 이베로와 켈트가 혼인해 호전적인 켈티베로족이 생겨난다. 반도의 북쪽은 켈트족, 남쪽은 이베로족, 중앙은 켈티베로족이 삼분한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막아낸다. 서부 지중해를 차지하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은 전쟁보단 상업에 전념하며 켈티베로족과 교역하고, 고대 스페인의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원전 1100년께 지중해 가장 깊숙한 레바논 지역에서 나온 페니키아가 지중해 무역의 최강자로 군림한다. 현대 유통업계의 시조새인 셈이다. 헤라클레스 신화의 모델인 멜카르트가 이들을 이끌고 이베리아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도시는 카디즈.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현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 세비야의 아래쪽에 와인으로 유명한 헤레스가 있고, 그 아래 있는 도시가 카디즈다. 멜카르트는 금, 은, 주석 등 자연 광물을 가져가고 알파벳, 염장, 건축 기술을 전파해 이베리아에 전에 없는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 당시 페니키아인은 이샤파니라 불린다. ‘숨겨진 땅(로마에서 보면 멀리 있는 숨겨진 땅)’ 혹은 ‘토끼가 많은 땅’이란 뜻이다. 그 뒤로 들어온 로마인들은 그들의 발음으로 ‘히스파니아’라 부른다. 히스파니아의 형용사인 히스패니코를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히스패닉이다. 미국에서 중남미 이민자를 부르는 히스패닉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어에서 H(HISPANIA)는 발음하지 않고, 니아(NIA)는 스페인 알파벳으로 네아(NA), 즉 I가 E로 치환돼 에스파냐가 된다. 영어로는 스페인, 중국어로는 서반아(西班牙)다. 페니키아 이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계가 지중해 패권을 쥔다. 알렉산더 사후에는 헬레니즘이라는 동서 간 문화 융합 흐름이 꽃피운다.
 

기원전 500년 페니키아인 후예로, 튀니지 일대에서 발흥한 카르타고가 다시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다. 카르타고는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베리아 남부를 근거지로 삼아 차츰 반도 전역까지 세력을 넓힌다. 그리고 지중해의 심장부에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당시 이탈리아반도에선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한다. 로마가 반도 전체를 정복하며 성장한 후, 당시 거대한 해상제국이 된 카르타고 견제에 나선다. 결국 동서 지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 시칠리아섬이 도화선이 돼 전쟁을 시작한다. 기원전 264년부터 241년까지 23년간 벌어진 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무역 거점이었던 이곳에서 도시국가 간 분쟁이 생기고 로마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전면전으로 번진 것이다. 로마는 육군, 카르타고는 해군이 강하다. 초반에 속수무책으로 로마가 당한다. 이게 자극이 돼 7년간 해군력을 증강한 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시칠리아섬을 차지한다. 로마제국이 승리하면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의 지배권을 잃고, 배상금까지 내느라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칠리아섬의 카르타고 육군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본국 정치세력의 시기에 시달린다.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베리아로 건너간다. 로마에 대한 치욕을 잊을 수 없어 이를 갈고 군대를 키운다. 기원전 221년 그의 아들 한니발이 카르타고 식민지를 통치한다. 218년 한니발은 팽창하던 로마와 협정을 한 발렌시아 지역의 사군토를 점령해 버린다. 이베리아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폭발한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로마 간 2차 포에니 전쟁. 9살 때 “내가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라고 신에게 맹세했던 청년 장군 한니발은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한다. 바로 헤라클레스의 길이다. 쉬운 지중해 바닷길을 두고 험준한 두 산맥을 넘어간 것은 헤라클레스의 뜻을 이어받아 로마의 억압받는 시민을 해방하는 위대한 원정을 한다는 의미다.

알프스산맥을 넘은 한니발은 흡사 고려-거란 3차 전쟁 때 유목민에게 유리한 평야를 마다하고 산지로 고난의 행군을 하며 고려 수도 개경까지 진군한 거란의 소배압을 연상케 한다. 험로로 진군해 결국 고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한 소배압. 한니발이 종말에는 로마 정벌에 실패하고 초라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빼다 박은 판박이다. 다름이 있다면 한니발은 초반에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전술로 2년간 로마의 10만 정예병을 무찌른다. 특히 칸나이 전투에서 전력의 열세를 뒤집고 로마군을 전멸시키면서 전쟁사의 한 획을 긋는다. 전력이 약한 군사는 중간에, 강한 군사는 양 끝에 배치한다. 가운데는 밀리고 양 끝에선 진군하면서 초승달 모양으로 포위하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쓴 학익진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로마에는 스키피오가 있었다. 과감하게 바다를 건너 한니발의 본거지이자 그의 아버지와 매형이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카르타헤나로 쳐들어가 장악해 버린다. 다급해진 한니발은 본국으로 회군하고, 급기야는 카르타고 남부의 자마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한니발은 소아시아(터키) 쪽으로 피신했다가 독을 마시고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이후 로마의 허락 없이는 무기를 들 수 없었던 카르타고가 최후의 저항에 나선다. 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중해의 여왕이 쓰러지고 로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포에니는 로마어로 페니키아를 뜻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포에니전쟁으로 불리는 것이다. 한니발이 소아시아에서 와신상담하며 세력을 회복해 권토중래를 노렸다면 역사는 어찌 바뀌었을까? 한나라 유방에게 패해 오강까지 쫓긴 초패 항우가 강동으로 건너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결한 것과 비슷한 꼴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이 오강변 정자에서 남긴 ‘제오강정’을 잠시 떠올려 본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여서 기약할 수 없는 법 / 수치심을 끌어안고 치욕을 참아야 남아인 것을 / 강동의 자제들 재주 있는 인재들이 많아 /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올 수(권토중래)도 있었을 텐데.’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광고멘트를 이 두 사람이 들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나는 경기장에서 9천 개 이상의 슛에 실패했고, 300여 경기에서 패배했으며, 스물여섯 번이나 승부를 결정짓는 슛에 실패했다. 계속 실패하고 실패한 것이 내 성공 원인이다.”
 

로마가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극히도 호전적이었던 원주민 저항이 무척이나 컸기 때문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중부에 루시타니아라는 원주민 국가가 있다. 뛰어난 게릴라 전술로 로마인의 치를 떨게 하는 비리아투스라는 영웅이 거느린 국가다. 한니발을 도와 자마전투에 참여했던 장군의 아들이었던 비리아투스는, 양치기에서 그렇게 루시타니아 부족을 이끄는 전사가 된다. 로마는 결국 루시타니아를 싸움으로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결국 비리아투스의 부하 3명을 매수해 암살에 성공한다. 그러나 로마는 암살한 부하들의 목까지 자른다. “로마는 배신자들에게 지불하지 않는다.”라며. 역사 이래 가장 거대한 제국을 가장 오랫동안 다스렸던 칭기즈 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칭기즈 칸은 소싯적 자신을 도와준 의형제였다가, 후에 몽골의 패권을 놓고 가장 치열한 라이벌이 된 자무카를 무찌르고 대칸에 등극한다. 광야를 전전하던 자무카는 부하들에 의해 칭기즈 칸에게 끌려간다. 보상을 바랐던 그 부하들은 그러나 자무카가 보는 앞에서 목이 달아난다. “제 왕에게 손을 댄 사람을 어찌 살려두겠는가? 저들과 그 자손까지 다 잡아 죽여라.” 배신자는 철저히 응징한다는 것이 칭기즈 칸의 신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하게 마련이라는 게 클리셰다.
 

2천 년이 훌쩍 지난 2008년 5월 지구로부터 120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낯선 별 하나와 행성 하나가 관측된다. 2015년 포르투갈 측의 의견을 들어 국제천문연합에서 두 천체의 이름을 '루시타니아'와 '비리아투스'로 짓는다. 루시타니아를 지킨 불굴의 영웅 비리아투스는 여전히 지금도 포르투갈인의 긍지로 남아있다. 현재의 소리아 지방에 있었던 누만시아의 9년 항전도 유명하다. 스키피오는 누만시아 둘레 9km에 성벽을 쌓고 15개월이나 고립시킨다. 4천여 누만시아인은 “로마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며, 로마의 전리품이 될 누만시아를 불태운다. 세비야의 스페인광장에 가면 이를 그린 그림 ‘소리아’가 전시돼 있다. 이베리아반도 최후 항전지는 아스투리아스와 칸타브리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19년 로마제국의 깃발을 꽂는다. 꼬박 200여 년이 걸렸다. 카이사르가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원정에 7년밖에 안 걸렸는데. 그래서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히스파니아는 로마가 최초로 원정에 나선 곳이지만, 최후에 정복한 곳이다.”라고 평가했다.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이베리아 정벌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비유하기도 한다. 다만 미국은 졌지만, 로마는 성공했다는 것이 다르다. 아니, 200년 후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이베리아를 점령한 로마는 스페인의 금, 은, 구리 등 지하자원뿐만 아니라 질 좋은 포도주, 올리브유, 양모, 절인 생선 등을 수출해 엄청난 부를 얻는다. 이베리아의 다양한 민족은 로마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친다. 시민권의 힘이다. 로마법 아래 라틴어를 사용하며 점점 로마화 되기 시작하고 결국 단순한 식민지나 속국을 넘어 로마제국의 일원이 된다. 로마 시대 5현제 중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2명을 배출한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만하면 로마의 중심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때 이베리아반도에는 크리스트교가 전해진다. 후에 스페인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가 되는 원천이다. 스페인 역사가 호세파 오르티스 데 도밍게스는 “스페인은 실질적으로 로마의 발명품.”이라고 평가했다.
 

로마가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 패권을 장악할 때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이룬다. 진시황의 고민은 불로불사. 여기에 하나 더, 빠른 이동과 무자비한 약탈을 하는 북방의 흉노족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다. 흉노는 후에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기원전 250년 급격히 세력이 약해져 전한에 밀려나면서 서쪽으로 밀리고, 더 이상 중국 역사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동양에서 사라졌지만, 그 후 200년이 지난 4세기, 비슷한 민족이 서양의 세력 판도를 뒤바꿔 버린다. 흉노에게 유목 노하우를 전수받은 훈족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강한 궁기병을 기반으로 유럽으로 뻗어나간다. 서구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훈족의 왕 아틸라는 로마제국 북쪽에 있던 게르만의 대이동을 촉발한다.
 

게르만은 1세기 북유럽에 거주하던 민족집단으로 프랑크, 앵글로, 색슨, 반달, 동고트, 서고트족 등 여러 분파로 이뤄졌다. 로마는 제국이 커짐에 따라 통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군인황제시대부터 정치 불안이 가속화된다. 결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눠줘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다. 서로마는 국방마저 게르만 용병으로 채우면서 혼란해진다. 이때 서고트족이 이민족의 침탈을 방어해 주는 조건으로 로마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러나 서고트족이 머물던 지역의 관리들이 이들을 괴롭힌다. 혐오 동물 고기를 비싸게 팔거나, 서고트족 자식을 노예로 데려가기도 한다. 서고트족은 굶어 죽을 바엔 싸우다 죽자는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로마제국은 서고트족을 진입하는 데 실패한다. 로마의 혼란을 틈타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로마를 마구 헤집고 다니며 행정조직을 무너뜨린다. 결국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의 오도아케르 왕에 의해 멸망한다. 초대 아우구스투스부터 5현제에 이르기까지 200년 넘게 평화가 유지된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는 결국 그들이 업신여기던 야만인에게 주인 자리를 내놓고 만다. 흉노라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저 멀리 로마에서 태풍을 일으킨 나비효과다. 로마뿐 아니라 전 유럽 대륙에 걸쳐 게르만 왕국이 건설된다. 이탈리아의 동고트, 북프랑스의 프랑크, 영국의 앵글로색슨,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이다. 서고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군림하며, 스페인을 300년간 통치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711년 내부 갈등이 시작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아 붕괴한다. 한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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